“선생님 말씀 잘 듣고, 친구들이랑 사이좋게 잘 지내라.” 이전부터 어른들은 학교에 가는 아이에게 당부하곤 했다.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에 으레 뒤따라붙는 이 훈계에는 아이가 다른 이와 원만히 관계를 맺으며 잘 지내길 바라는 바람이 담겨 있다. 단순히 돌봄을 받는 곳에 가까운 어린이집이나 유치원과 달리 학교야말로 이제 제법 사람꼴을 갖춘 아이가 처음으로 어떤 집단에 속해 생활하며 본격적으로 관계 맺기를 배워나가는 곳이라서다.
학교란 문자 그대로 가르치고 배우는 곳임과 동시에 우리가 인생에서 처음 겪는 공동체이기도 하다. 비록 국가가 의무를 강제해 만들어낸 공동체라지만, 어찌 됐든 우리는 이곳에서 유무형적인 공통의 규율과 의무, 의사소통법을 익혀나간다. 청소 당번을 하면서 싫어도 공동체를 위해 뭔가 해야 할 때가 있다는 걸 깨닫고, 말하고 싶은 게 있을 때 손을 들어 발표한다. 친한 친구와 모여 앉아 밥을 먹기도 하고, 함께 규율을 어기며 땡땡이를 치기도 한다.
이 공동체를 책임지는 건 물론 교사다. 때문에 교사라는 일의 본질은 단순히 ‘가르치는 것’보다는 학교 혹은 학급이라는 공동체를 잘 가꾸고 유지하는 것에 더 가깝다. 학원과 학교가 구분되는 건 이 지점이다. 학원에서 일하는 강사에게는 공동체를 유지할 책무가 주어지지 않기에 온라인 강의만 진행해도 성적만 오른다면 소임을 다하는 것이지만 학교에서 일하는 교사는 그렇지 않다.
문제는 학교라는 공동체가 각자도생하는 이 시대의 학생들, 아니 학부모와 충돌할 때다. 자녀가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남을지가 무엇보다 중요한 지금 세대의 학부모에게 공동체가 어떻게 유지되는지는 사실 중요치 않다. 교사들은 사실 학교의 구성원인 아이들 앞에서 수업하는 게 아니라 그런 학부모의 분신을 모시고 있는 꼴이다. 그렇기에 학교라는 공동체는 이미 무너졌다. 아니, 이미 그런지 오래라는 걸 우리 모두 알고 있다.
한 교사가 교실에서 목숨을 끊었다. 어떤 이는 이 사건에서 교권 추락을, 어떤 이는 갑질에 당한 노동자의 모습을 읽는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사건은 학교라는 공동체가 파산했다는 걸 다시 가르쳐준다. 자녀에게 악영향을 끼친다며 고인을 기리는 화환마저 반대하는 학부모들의 모습보다 이 점을 잘 드러내는 장면이 있을지 나는 상상할 수 없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자신들의 분신인 자녀의 개별적 안위이지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애도 따위가 아니다.
과거 교사들은 공동체를 물리적 폭력으로 유지시켰다. 학급에서 의무를 다하지 않는 아이들은 어김없이 두들겨 맞았고 기합을 받았다. 사실 우리 사회 전체가 그랬다. 부랑자들을 교화시킨다며 교육대와 복지원에 집어넣고,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군에 들어가 수년간 구타당하고 얼차려를 받았다. 심지어 가정과 직장에서도 그런 일이 잦았다. 이런 사회에 속한 학교 공동체에서 폭력은 어쩌면 당연했다.
교실에서는 이제 더 이상 물리적 폭력을 허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교사들은 폭력 없이 학교 공동체를 건강하게 유지할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하다. 이런 학교에서 어떤 교사들은 공동체를 유지할 책무 자체를 회피하고, 자신들의 일을 단순히 교과목을 가르치는 것에서 멈춰 세운다. 정규직 대신 기간제 교사가 담임을 떠맡는 일이 잦아지는 건 이 점을 잘 보여준다. 교사들조차 각자도생하기 시작한 교실에 공동체성이 남아 있을 리 없다.
사실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은 학교 밖과도 닮아 있다. 우리 사회는 폭력이 사라진 빈자리에서 공동체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법을 깨우치지 못했다. 아무도 공공의 이익이나 가치를 거들떠보지 않고, 힘없는 개인이나 집단에 연대하지도 않는 사회라면 그에 속한 공동체 역시 그 모습을 닮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학생인권조례나 체벌 금지 따위에서 이번 일의 원인을 찾거나 ‘빽’이 누군지에 몰두하는 작금의 행태는 문제의 본질을 한참 비껴가 있다.
어느 때보다 교실을 향한 관심이 높다. 우리는 이번을 계기로 교실이라는 공간에 폭력 없이도 서로를 존중하는 배움의 공동체를 만들 방법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 공동체를 책임지는 교사와 그 구성원인 학생 그리고 학부모 모두가 거들어야 할 과제다. 우리 사회가 먼저 바뀌지 않고선 쉽지 않을 일이지만, 교실에 폭력을 다시 불러내자는 식의 철 지난 얘기로는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다.
조효석 뉴미디어팀 기자 prome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