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2일부터 나흘간 서울 국립극장에서는 특별한 공연이 열렸다. 여느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연극 ‘우리읍내’는 청각장애인인 농인배우 2명과 비장애인인 청인 배우 14명이 무대에 올랐다. 음성해설자와 공연수어통역가 6명도 함께 했다. ‘우리읍내’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간의 경계를 허물고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배리어프리’ 공연이다.
배리어프리는 장애인이나 고령자가 차별 없이 살 수 있도록 물리적·제도적 장벽을 허물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장애인 입장에서 세상 바라보는 기회
임도완(64) 연출가는 이번 공연이 장애인 배우와 함께하는 첫 공연인 만큼 어떤 식으로 배우에게 접근해야 할지 많은 고민의 시간을 거쳐야만 했다. 공연을 계획하는 과정부터 연습, 리허설, 본 무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준비 과정에서 비장애인이라면 당연하게 인지하고 반응하는 부분이 농인 배우에게는 낯선 영역이었다. 이들은 모든 부분에 있어서 한 템포 늦게 반응했다. 지난 20일 서울 국립극장에서 만난 임 연출가는 “이번 공연은 굉장히 새로운 경험이었다”며 “그동안 비장애인의 시선으로만 세상을 바라봤다면 (공연을 통해) 장애인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얻게 된 것이 가장 큰 수확 중 하나”라고 말했다.
우리읍내에서 농인 배우 박지영씨와 함께 호흡을 맞춘 청인 배우 안창현(34)씨는 공연을 마치고 수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농인 배우와 더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다.
안씨는 “(공연이) 배우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한 단계 성장하는 시간이었다”면서 “수어를 배우면서 농인들이 겪는 불편함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됐다. 생각과 발상의 전환을 하게 된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배리어프리의 신호탄 될까
농인 배우과 호흡을 맞추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을까. “장애를 가진 배우와 연기를 한다고 해서 어려운 점은 없었어요. 시간이 날 때마다 서로 대본을 가지고 많은 대화를 나눴거든요. 하지만 이미 쓰여진 대본을 수어로 번역 및 단순화하는 과정에서 애를 먹었어요. 수어와 한국어는 완전히 다른 언어더라고요.”
공연이 끝난 후 안씨가 받은 피드백은 그동안의 고생을 날려버릴 만큼 신선했다. 배리어프리의 시작점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고 한다. 농인뿐만 아니라 청인들도 공연을 보면서 불편함을 느낀 것이다. 배리어프리 공연 특성상 청인들도 농인 배우의 수어 연기를 음성해설을 통해 이해해야 했던 것이다.
안씨는 “배리어프리 공연은 모두가 불편한 공연이었다는 사실이 너무 신선했다. 농인과 청인들이 같은 공연을 보면서 같은 경험을 했다는 것이 의미있게 다가왔다. 앞으로 농인 배우와 함께 연기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그들과 더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웃어보였다.
발달장애인이 예술가로 서기까지
연기 뿐만 아니라 그림과 악기 연주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벽을 허문 사례도 있다.
18명의 발달장애인으로 구성된 밀알첼로앙상블 ‘날개’는 올해로 창단 11주년을 맞이했다. 날개는 매년 비장애인 연주자를 게스트로 초청해 정기연주회를 개최한다. 앙상블의 단원은 모두 발달장애인으로 구성됐지만 이들을 이끄는 지휘자는 비장애인이다. 장애인들이 꼬리표 없이 자신의 존재 그 자체로 인정받는 기회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밀알복지재단(이사장 홍정길 원로목사)이 창단한 발달장애인 예술단 중 하나인 ‘브릿지온 아르떼’ 소속 최석원(23) 작가는 발달장애인이다.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그는 그림으로 세상과 소통한다.
최 작가는 지난 22일부터 9월 10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진행되는 ‘렛츠플레이아트전’에 참여하고 있다. 7개 전시 섹션과 10가지 창의예술체험으로 구성됐으며, 예술과 놀이를 한 자리에서 즐길 수 있는 대규모 예술 체험형 전시다.
최 작가는 첫번째 전시 섹션인 ‘동물의 숲’에서 7개 작품을 출품했다. 그는 동물을 주로 그리는 만큼 이번에 전시한 작품에서도 약육강식 세계가 아닌 서로 배려하고 공유하는 상상 속 동물나라를 표현했다.
그의 어머니 임은화(53)씨는 23일 국민일보와 통화에서 최 작가와 함께 전시회를 둘러본 소감을 밝혔다. 그는 “(최 작가가) 관람객들이 자신의 그림을 가까이에서 흥미롭게 관람하고 무엇을 그렸는지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박수를 치면서 굉장히 뿌듯해했다”고 말했다. 이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차별 없는 세상을 꿈꿨는데 이번 전시회가 그 시작”이라며 “최 작가도 ‘좋다. 즐겁다’를 연달아 말했다”고 덧붙였다.
이번 전시회는 최 작가가 대중에게 발달장애인 최석원 작가가 아닌, 예술가 최석원으로 보여지는 자리이기도 했다. 7점의 작품 어디에서도 그가 발달장애인임을 알 수 있는 흔적은 없다.
최 작가는 “많은 사람에게 제가 가장 좋아하는 동물 그림들을 보여드릴 수 있는 기회가 생겨 기쁘다”고 전했다.
유경진 기자 yk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