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포커스] 김여정의 역설

입력 2023-07-24 04:07

북한이 주도권을 잃고 불안해한다. 북한은 2019년 10월 미국과 마지막 협상을 결렬시키면서 “우리 인민의 생존권과 발전권을 저해하는 대조선 적대시 정책을 완전히 철회하기 전에는 협상은 없다”라고 선언했다. 두 달 후 노동당 제7기 5차 전원회의를 통해 대미·대남 강경정책인 ‘정면돌파전’을 선포하고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김여정이 지난 17일 발표한 담화는 새롭다. 정면돌파전을 통해 “미국의 제재 책동을 분쇄”할 때까지 “대화는 없다”라는 입장에 변화가 읽힌다. 한·미가 제안한 “전제조건 없는 대화”를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오히려 대화를 위한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이를 북한이 처한 상황을 반영해 속마음이 담긴 1인칭으로 풀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합동군사연습과 전략자산 전개를 멈춰 달라. 미국 남조선 연습도 버거운데, 일본까지 포함해 작년 10월과 올 2월 우리는 꿈도 못 꾸는 최첨단 이지스함을 동원해 훈련하는 건 정말 부담된다. 미사일 표적 정보를 탐지·추적·요격하는 훈련은 우리 핵미사일 효용성을 없앤다. 워싱턴 선언으로 시작된 ‘핵협의그루빠’는 남조선 미국이 공조 수위를 극대화해 우리 핵을 제도적으로 다루려는 시도다. 정착한다면 미국이 ‘대한민국’을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선전을 통한 남남 갈등이나 남조선 미국 간 이간질도 어렵다. 더는 우리의 “막강한 핵무력”으로 남조선을 겁박할 수 없고, “영토 완정”도 요원해진다.

최근 남조선에 기항한 전략핵잠수함도 정말 부담스럽다. 최고지도자 김정은 동지가 2021년 8차 당대회에서 핵잠수함을 개발한다고 선포했지만 요원하다. 화성 15, 17, 18형이 미국 본토를 때릴 수 있는 “절대무기”이나 미국 오하이오급 전략핵잠수함 1척이 가진 핵 능력에 턱없이 못 미친다. 더욱이 남조선에 기항한 것은 우리 핵에 대한 대응 능력을 고도로 “가시화, 체계화”하는 시도로 우려된다.

둘째,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 비핵화인 ‘CVID’는 잊어 달라. 지난 40년 모든 것을 걸고 만든 “국체” 핵을 포기할 수 없다. 화성 18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몇 번 더 쏴서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면 미국과 담판할 것이다. 이때 ‘완전하고 불가역적인 비핵화’ 따위는 제치고 우리를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의미를 담은 핵 군축 협상을 하자. 그러면 2018년 4월 약속했던 것처럼 핵과 ICBM 시험을 더는 하지 않고, 유엔 제재를 다 해제하면 영변 핵시설도 내어줄 수 있다. 기존 핵무기는 ‘핵 균형’ 차원에서 가지고 있겠다.

셋째, 제재 때문에 너무 힘들다. 우리가 말로는 “제재 완화 따위”에 관심 없다 하지만 위대한 지도자 동지의 통치자금 확보가 막히고, 인민 생활도 더는 졸라맬 허리띠가 없다.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가 작년 9월 최고인민회의에서 “후대들의 안전을 담보하는 핵을 대부로 개선된 가시적인 경제 생활환경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으나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미합중국은 행정부가 바뀌더라도 어떻게든 해제된 제재를 “손바닥처럼 뒤집지” 않도록 궁리하라. 이전에 ‘테로지원국’에서 해제한 후 다시 “모자”를 씌워서 너무 힘들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불)가변적이고 (불)가역적으로” 제재를 해제하라.

김여정의 담화는 장기전으로 끌어가려는 여력이 다해감을 표출한다. 원하는 최대치 목표를 자신들의 문법으로 밝힌 것은 미국의 일방적인 선조치 없이는 어떤 대화도 없다는 태도에서 한발 물러난 것으로 읽힌다. 이는 한·미 공조로 북한 위협을 ‘억제, 단념’시키는 노력이 일부 결실을 맺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제는 CVID라는 최종 목표를 간직한 채 핵 포기로 얻을 수 있는 혜택을 강조하면서 ‘대화’로 끌어낼 때다.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북한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