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뒷산 정상 부근에 있는 헬기장 밑이 시작점 같습니다. 거기 흙이 아래로 떠밀려 내려오면서 마을을 덮쳤어요.”
산사태로 큰 피해를 입은 경북 예천군 효자면 백석리에서 나고 자랐다는 임영식(70)씨는 17일 무너진 지붕 위에 얹힌 큰 나무를 가리키며 한숨을 쉬었다. “저 큰 나무가 밀려 내려오니 집들이 버틸 수 있겠나. 끌고 내려오는 흙이 많아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수십년 동안 끄떡없던 곳인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임씨가 지목한 헬기장은 생긴 지 50년이 넘었다. 최근 공사를 한 적도 없었다. 그는 “열여섯 살 때도 산사태가 났었다. 그 이후론 처음”이라며 “(산사태가 날지) 누군들 알았겠느냐”고 했다.
예천의 동시다발적 산사태 원인을 두고 여러 평가와 분석이 나온다. 피해가 가장 컸던 백석리와 감천면 벌방리 주민들은 이번 산사태를 ‘이례적인 사건’이라고 했다.
벌방리의 이장 박우락씨는 “장마가 시작된 뒤 비가 산 위에 집중적으로 왔던 것 같다”며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몰랐다. 여기는 비가 계속 오진 않았다”고 말했다. 백석리와 벌방리 모두 마을 뒤편에 백두대간이 자리한다. 고지대에 간헐적 물폭탄이 쏟아지는 등 달라진 강우 패턴이 산사태를 유발했을 거라는 얘기다.
이수곤 전 서울시립대 토목공학과 교수는 “2011년 서울 우면산 산사태도 고지대 공군부대 조성을 위해 땅을 평평하게 만들고 길을 내면서 산사태가 촉발됐다. 헬기장도 유사한 원인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지어진 지 오래돼서 그것만으로 원인이 됐다고 단정하긴 어렵다고 덧붙였다.
지역 주민들은 토지 개간 등으로 지반이 약해진 점도 산사태를 키운 배경이 됐을 수 있다고 말했다. 산사태로 피해를 입은 예천군 은풍면 지경터 마을은 최근 10여년에 걸쳐 귀농·귀촌 인구가 유입됐다. 현재는 원주민보다 많아져 전체 주민의 70%가량이 외지인이라고 한다.
이들이 오면서 마을은 탈바꿈했다. 경작 면적이 좁은 계단식 형태의 과수원은 평지로 확장됐고, 지게를 지고 올라갈 만큼 협소한 비탈길은 큰 트럭이 오갈 수 있을 정도로 넓어졌다. 잦은 토지 개간과 도로 확장으로 인해 지반이 약화됐을 수 있다는 추측이 가능한 대목이다.
실제 이번 산사태 피해는 귀농 가구에 집중된 것이 특징이다. 벌방리의 상황도 비슷했다. 수십년에 걸쳐 개간과 도로 확장이 이뤄졌고, 인명 피해는 대부분 새로 유입된 가구에서 발생했다. 이 교수는 “공사 등 인위적인 행위가 산사태의 원인이 됐을 가능성이 있다. 저지대의 부실화를 촉발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예천 지역에선 비가 내렸다 그치기를 반복하는 궂은 날씨 속에서도 구조대원들의 실종자 찾기가 계속됐다. 그러나 전날 60대 여성 시신을 발견한 뒤로 나머지 실종자 8명에 대한 소식은 없는 상황이다. 경북도소방본부 관계자는 “수색 구조 여건이 매우 좋지 않지만 최선을 다해 실종자를 찾겠다”고 말했다.
예천=김재환 기자 j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