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들께 나와 아내 황영희 박사에게 공통으로 의사의 길을 걷도록 영향을 준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와 성산 장기려 박사에 관해 말씀드리고 싶다.
앞서 언급한 대로 나의 부친은 일본 도쿄대 전신인 도쿄수의전문학교에서 수의학을 전공했는데, 기회 있을 때마다 어린 아들에게 슈바이처 박사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나는 비록 가축을 돌보는 수의학을 했지만 너는 반드시 사람을 위하는 의학을 하여라.” 선친께서 하셨던 말씀이다.
회고록을 집필하며 슈바이처 박사가 직접 저술하고 천병희 교수가 번역해 펴낸 ‘나의 생애와 사상’을 다시 구해 읽었다. 아프리카 선교 동기를 밝히는 이 대목이 특히 눈에 띄었다.
“1898년 어느 청명한 여름날 아침, 나는 귄스바흐에서 눈을 떴다. 그날은 성령강림절이었는데 이때 문득 이러한 행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이제 나도 무엇인가 베풀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창밖에서는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는데, 조용한 생각 끝에 서른 살까지는 학문과 예술을 위해 살고 그 이후로는 인류에 직접 봉사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로부터 15년 뒤인 1913년 38세의 슈바이처는 의료 선교사가 되어 아프리카로 떠났다. 인생의 전반부인 1899년 스물네 살에 철학 박사가 됐고 이듬해에는 신학 박사가 되었으며, 1903년부터 슈트라스부르크대 신학부 정교수가 되어 학생을 가르치며 목회도 병행한 그였다. 어린 시절부터 목사인 아버지에게 배운 파이프 오르간으로 바흐의 칸타타를 수준급으로 연주하기도 했다. 철학자 성직자 음악가로 선망을 받는 인생이었지만, 슈바이처 박사는 육신으로 고통받는 이웃을 치료해 영혼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일보다 더 귀한 일은 없다고 판단했고 마침내 의학을 공부하게 된다. 그리고 문명 세계에서 누리던 행복과 특권을 포기하고 홀연히 아프리카를 찾아 생의 후반부를 바치게 된다.
부산대 의대 캠퍼스에서 만난 아내 황 박사도 어려서부터 슈바이처 박사를 통해 의학을 공부할 결심을 했다고 말했다. 아내는 2017년 펴낸 회고록 ‘아프지만 살아내야지!’를 통해 아프리카에서 환우를 돌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슈바이처 이야기가 특별히 큰 울림을 주었다고 밝혔다.
나와 아내의 롤모델인 성산 장기려 박사님 역시 잊을 수 없다. 나는 장 박사께 직접 사사 받을 기회는 얻지 못했다. 다만 장 박사가 가끔 부산대에 오셔서 특강을 했는데 강의 내용보다 그분의 인자한 풍모에서 우러난 인품이 기억난다.
반면 아내 황 박사는 인턴 후 잠시 장 박사님의 부산 복음병원에서 근무하면서 아침 경건의 시간(QT) 예배 경험, 수술장 직접 지도를 받는 행운을 누렸다. 슈바이처 박사와 장 박사님의 뜻을 따라 우리 부부도 1997년 아프리카 의료 선교 위한 아프리카미래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과 고문으로 섬겨왔다.
정리=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