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들은 아무리 어렵다 하더라도 학창 시절 교과서 없이 공부한 학생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나의 경남중·고와 부산대 의대 시절에는 이런 풍경이 심심찮게 있었다. 나도 그런 학생 중 한 명이었다. 가난한 환경 탓에 나는 책 없이 공부했다. 교과서는 말할 것도 없고 참고서 구입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일 때 나는 친구들이 노는 동안 잠깐씩 책을 빌려 배운 내용을 순간순간 머리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어깨너머로 공부한다는 옛 어른들의 말을 실감한 학창 시절이었다. 책이 없으니 예습 복습을 더 철저히 했다. 처음에는 이런 노력이 힘든 고통이었지만 차츰 적응돼 순간의 공부가 오래 뇌리에 남는 소중한 경험을 축적하게 됐다.
이렇게 공부한 습관은 나에게 대단한 축복을 불러왔다. 한 번 본 것은 웬만해서 잘 잊어버리지 않는 축복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이 순간 기억법이라고도 하고 연상법이라고도 했다. 직관과 사고의 순발력도 이때 생긴 것 같다.
나의 이른바 무책축복(無冊祝福)은 부산대 의대 재학 중 미국 의사자격(ECFMG: Educational Commission for Foreign Medical Graduates) 시험 합격으로 이어졌다. 가난으로 고달픈 대학 시절이었지만 나는 남모르게 커다란 목표를 세웠다. 미국에서 의사를 할 수 있는 자격을 따고 유학을 가는 것이었다. 강의가 없는 날엔 시간을 쪼개어 아르바이트하고 남는 시간을 미국 의사시험 준비에 쏟아부었다.
의대 시절 6년은 휴식과 거리가 먼 노동과 학업의 연속이었지만 본과 4학년 2학기 졸업을 앞두고 미국 의사시험에 합격했다. 부산대 의대 재학 중 합격은 최초였다. 동료들과 후배들을 위해 이 분야 자격시험 예상 문제집까지 만들었다. 이때 터득한 핵심 정리 습관은 내 바로 밑 동생 상지를 서울대 법대에 합격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청소년기 가난이 가져다준 책 없이 공부한 습관이 계속된 축복으로 이어졌다.
나는 평소 치유와 교육을 뗄 수 없는 관계라고 생각했다. 어려서 죽음에 대해 체험을 하고 성장 과정에서 아버지의 권유와 슈바이처 박사의 영향을 받아 의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했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과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내 안에 함께 자리 잡았다. 교육은 인간을 지성과 인격의 무지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고, 의학은 인간의 병든 육신과 정신을 치유하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우리나라에 기독교 복음을 전파한 초기 선교사들이 서양의 교육과 의술을 동시에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서양 의학의 출발이 알렌 헤론 스크랜턴 에비슨 같은 의료선교사들에 의해 이 땅에 심어진 역사적인 사실임을 확인하면서 이런 확신을 갖게 되었다. 치유가 인간의 구원과 관계된 것이라면, 교육은 인간의 창조적인 발전과 관계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리=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