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화폐 업계가 비트코인 현물 상장지수펀드(ETF) 상장을 시도하는 등 제도권 편입에 도전한다. 가상화폐는 지난해 알고리즘 스테이블 코인을 표방했던 ‘테라 루나 폭락 사태’에 이어 글로벌 3위 거래소 FTX가 파산하면서 신뢰에 큰 타격을 받았지만 최근 위상 재정립에 나서고 있다.
가상화폐 가격 상승세만 놓고 보면 제도권 편입 기대감은 높다. 가상화폐 대장주인 비트코인 1개 가격은 올해 들어 90%나 상승해 연고점인 4000만원대(약 3만 달러)에서 거래 중이다. 같은 기간 이더리움도 60% 이상 오른 250만원 안팎에 거래되고 있다. 블룸버그는 “소멸 직전에 이르렀다고 평가했던 시장의 놀라운 발전이자 회복력”이라고 평가했다.
월가(街) ‘큰 손’ 나섰다
가상화폐 재기 시도는 9조 달러(약 1경원)를 운용하는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이 지난 15일 미국증권거래위원회(SEC)에 비트코인 현물 ETF ‘아이셰어즈 비트코인 신탁’ 상장을 신청하면서부터다. ETF는 특정 자산의 가격 변화에 수익률을 연동시킨 펀드 상품이다. 자산운용사가 현물 ETF를 운용하려면 실제로 현물 비트코인을 갖고 있어야 한다. 비트코인은 이미 유통 물량이 정해져 있어 ETF가 운용되는 과정에서 운용사가 비트코인 매수에 나설 수 밖에 없고, 이 경우 가격이 더 오를 가능성이 높다.
물론 신청한다고 모두 승인되는 것은 아니다. 비트코인 현물 ETF 상장 시도는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2013년부터 33차례나 있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시세 조작 가능성과 적용 법안이 모호하다는 게 지금까지 SEC의 입장이었다. 이번에도 앞선 시도처럼 SEC의 문턱을 넘지 못하면 기대감으로 상승했던 비트코인 가격이 하락할 수도 있다. 홍성욱 NH투자증권 연구원은 “SEC가 지금의 강경한 태도를 유지한다면 통과되지 못할 가능성도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시장이 기대감을 유지하는 것은 블랙록의 이름값 때문이다. 블랙록이 지금까지 SEC에 신청한 ETF 상장 성공률은 99.8%다. 총 576건의 ETF 신청서 중 1건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통과시켰다. 블랙록은 ETF 상장 신청서에 미국 비트코인 거래 플랫폼과 감시공유협약을 맺겠다고도 했는데, 이 역시 앞선 시도와는 차별되는 조건이다.
블랙록이 앞장서자 또 다른 자산운용사 위즈덤트리와 인베스코도 잇따라 비트코인 현물 ETF 상장을 SEC에 신청했다. 이들은 앞서 SEC에 현물 ETF 상장 신청을 했다 승인받지 못했지만 재도전했다. 만약 현물 ETF가 상장되면 가상화폐 거래소 계좌가 없는 투자자도 증권 계좌만으로 손쉽게 비트코인에 투자할 수 있다.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거래소나 암호화폐 해킹 문제에도 자유로워진다.
월가 6개 금융사가 공동으로 가상화폐 거래소를 설립한 것도 호재다. 시타델과 피델리티, 찰스 슈왑, 세콰이어 등 6개 금융사 합작으로 가상화폐 거래소 ‘EDX마켓(EDXM)’ 을 설립했다. EDXM은 지난 20일부터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비트코인캐시, 라이트코인 4종의 거래를 시작했다. 시장에서 논란이 없는 주요 코인만 거래하고 있다. 특히 SEC와 소송 중인 리플은 상장시키지 않았다. EDXM은 업비트나 빗썸 등 국내 거래소와 달리 기관 투자자에게만 서비스를 제공된다는 점에서 제도권 편입에 한 발 전진하게 된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가상화폐 투자운용사인 라이언 라스무센 비트와이즈 연구원은 “금융 대기업의 장기적인 신념이 상대적으로 낮았던 투자 심리와 투자자의 신뢰를 높였다”고 설명했다.
파월 연준 의장의 깜짝 발언
‘세계 경제 대통령’으로 불리는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연준) 의장의 뜻밖의 발언도 가상화폐 제도권 편입 가능성에 힘을 더했다. 파월 의장은 지난 22일 하원 금융서비스위원회에 출석해 “가상화폐가 화폐의 지위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며 “자산으로서 ‘지속적인 힘(staying power)’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파월의 발언은 결제용 스테이블 코인에 한한 것이지만 기존 견해와 크게 달라지는 것이어서 시장은 상승으로 화답했다. 파월 의장은 가상화폐에 긍정적인 시각을 가졌던 인물은 아니다. 그는 취임 첫해 2018년 가상화폐에 대해 ‘투기성 자산’에 불과하다고 평한 바 있다. 스테이블 코인은 미국 달러나 유로 등에 고정돼 변동성을 낮춘 것이다. 테더의 USDT, 서클의 USDC, 바이낸스의 BUSD 등이 스테이블 코인으로 분류된다.
다만 현재 코인 투자자가 단기적인 호재에만 반응하고 있다는 신중론도 있다. 파월 의장은 이날 “모든 선진국에서 화폐에 대한 신뢰의 원천은 중앙은행”이라며 “우리는 연방 정부가 강력한 역할을 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규제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시장 개입을 하기 위한 언급일 뿐이라는 분석이다.
추가 기준금리 인상 가능성도 가상화폐 제도권 편입에 대한 신중론에 힘을 더한다. 연준은 지난 14일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를 통해 연내 0.25% 포인트씩 총 두 번 금리를 인상할 가능성이 담긴 점도표를 공개했다. 기준 금리 상단이 5.75%까지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금리가 인상되면 주식과 가상화폐 등 위험자산 선호 현상은 위축된다. 비트코인은 2021년 역사적 고점인 7000만원을 넘어서기도 했지만, 연준의 가파른 금리 인상과 정부 규제 등의 영향에 하락한 전례가 있다.
이광수 기자 g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