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리더십을 뒤흔든 러시아 용병기업 바그너그룹의 무장 반란은 그야말로 전격적이었다. 바그너그룹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은 러시아군 수뇌부를 무너뜨리겠다고 선언하며 2만5000명의 용병을 동원해 하루 만에 모스크바 턱밑까지 진격했다. 푸틴 대통령은 대국민 연설을 통해 반역자를 처벌하겠다고 말했지만 몇 시간 뒤 스스로 이를 되돌렸다. 벨라루스의 중재로 반란은 하루 만에 일단락됐지만 파장은 우크라이나 전쟁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예측했다.
프리고진은 지난 23일 밤(현지시간) 오디오 메시지를 통해 러시아군 수뇌부를 ‘악’으로 지칭하며 “우리 병사를 파괴한 자들, 러시아 군인 수만명의 생명을 파괴한 자들은 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 국방부가 자신들의 후방 캠프를 미사일로 공격했다고 주장하며 군 수뇌부 처벌을 요구했다. 러시아는 그러나 프리고진을 무장 반란 선동 혐의로 입건하고 체포 명령을 내렸다. 바그너그룹을 상대로 한 대테러 작전 체제도 발령했다.
몇 시간 뒤인 24일 오전 러시아 남부 주요 군사거점인 로스토프나도누 군 사령부 인근에 바그너그룹 병력이 등장했다. 탱크와 군용차량이 건물을 포위했고 시내 중심가를 순찰하는 모습도 목격됐다. 오전 7시30분 프리고진이 해당 지역을 장악했음을 밝히는 영상을 공개했다.
푸틴 대통령은 오전 10시쯤 대국민 연설을 통해 “우리는 등에 칼이 꽂히는 상황을 목격하고 있다. 반역에 직면했다”며 “군을 상대로 무기를 든 모든 이는 반역자”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대응은 가혹할 것이며 가담자는 처벌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프리고진도 즉각 “바그너 전사들은 대통령이나 그 누구의 요청에 따라 항복할 계획이 없다”고 응수했고, 병력을 모스크바 방향으로 진격시켰다. 영국 국방부는 바그너그룹이 서남부 보로네시 지역을 통해 북쪽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확인했다. 모스크바로 향하려는 의도가 분명해지면서 대규모 유혈사태 우려가 커졌다.
러시아군은 제대로 방어선을 지켜내지 못하며 속수무책으로 진군을 허용했다. 바그너그룹은 하루 만에 1000㎞ 거리를 내달렸다. 곳곳에서 교전이 벌어졌지만 러시아군은 헬리콥터 6기와 항공관제기 1기 등 항공기 7기를 잃었다. 러시아 매체는 러시아군 15명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바그너그룹이 가까이 오면서 모스크바는 초긴장 상태에 빠졌다. 도시로 진입하는 대부분의 길목에 차단 장치가 설치됐고, 남부 외곽에는 장갑차와 병력이 주둔한 검문소가 설치됐다. 바그너그룹의 진격을 막기 위해 굴착기 등 중장비가 도로를 파헤치는 모습도 포착됐다. 시 당국은 붉은 광장 등을 폐쇄하고 주민에게 통행 자제를 촉구했다.
오후에 상황이 급반전했다. 프리고진은 다시 오디오 메시지를 통해 병력 철수 지시 사실을 알렸다. 프리고진은 “우리는 23일 정의의 행진을 시작했고, 하루 만에 모스크바에서 거의 200㎞ 내까지 왔다”며 “지금까지는 전사들의 피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지만 이제는 피를 흘릴 수 있는 순간이 왔다”고 말했다. 이어 “한쪽 러시아인이 피를 흘리는 데 따르는 책임을 이해하므로 병력을 되돌려 기지로 돌아간다”고 말했다.
벨라루스 대통령실도 “푸틴 대통령과의 합의하에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이 프리고진과 협상했다”며 “양측은 러시아 내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지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데 뜻을 모았다”고 밝혔다. 또 바그너그룹 소속 병사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합의도 논의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바그너그룹은 이 같은 발표 이후 장악했던 로스토프나도누에서 병력을 이동했다. 곧이어 드미트리 페스코프 러시아 크렘린궁 대변인은 “프리고진에 대한 형사 입건은 기각되고, 반란을 일으킨 전사들도 기소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페스코프 대변인은 “루카셴코 대통령이 프리고진과 약 20년간 개인적으로 알고 지냈다. 그가 자원해 양측 중재에 나선 것”이라고 설명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날 TV 연설 직후 가장 먼저 루카셴코 대통령과 통화해 상황을 공유했고, 이때 루카셴코 대통령이 중재를 자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러시아 텔레그램 채널에서는 이날 푸틴 대통령의 전 보안 책임자이자 현 러시아 툴라 지역 주지사인 알렉세이 듀민이 양측을 중재했다는 말이 돌았다.
미 정보 당국은 프리고진이 꽤 오랫동안 러시아군 수뇌부에 대한 주요 반격을 계획한 것으로 파악했다고 CNN이 3명의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정보 당국은 지난주 초 이미 의회 (상·하원 여야 원내대표 등 지도자 모임인) 8인회에도 이 같은 상황을 브리핑했다고 한다.
한 소식통은 “프리고진이 무기와 탄약을 모으는 등 반란 움직임에 대해 준비하고 있었다는 징후를 목격했다”며 “우크라이나 작전을 위한 탄약 부족 주장도 군사 반란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고의적 술수로 본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이번 사태에 대한) 정보 당국의 결론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러시아 내부에서 긴장이 일고 있다는 명백한 신호라는 것”이라며 “바그너그룹과 러시아군 모두에게 전황이 얼마나 악화하고 있는지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워싱턴=전웅빈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