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모차, 사교육, 결혼, 집, 출산… 한국, 온 생애에 ‘격차’ [이슈&탐사]

입력 2023-06-26 00:02

청년세대와 직장인들이 “열심히 일하고 사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다”는 회의감으로 현재를 위한 소비나 가상자산 투자에 몰두하는 경향은 최근의 집값 상승을 빼고 설명되지 않는다. 2020년 서울 아파트값은 한 해 동안 13.06%(KB부동산 기준) 상승하면서 필수재인 집은 평범한 이들이 쳐다보지 못하는 사치재처럼 인식되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필수재를 포기할 때 소비 여력이 충분한 이들은 앉은 자리에서 시세 차익을 누렸다.

경제 전문가들은 “부동산 폭등기는 한국인의 소비 격차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시기였다”고 말한다. 비생산적 자산에서 발생하는 이윤이 극대화되기 때문에 현대 자본주의를 ‘불로소득 자본주의’로 규정하는 학자도 있다. 자산 불평등에서 온 양극화의 심화가 박탈감을 자아내는 것은 물론 계층이동 기대감마저 꺾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은 학문적으로 논증돼 있다.

대한국토·도시계획학회지 ‘국토계획’에 2021년 게재된 논문 ‘주택가격의 불평등은 계층이동 가능성의 기대감을 낮추는가’는 주거 소비격차가 상대적 박탈감을 심화하는 과정을 분석한 결과다. 2011~2019년 국토교통부 주택 실거래가와 서울서베이 도시정책 지표조사를 비교한 이 논문은 또 상대적 박탈감이 특히 저소득층(소득 하위 30%)의 계층이동 기대감을 낮추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러한 흐름을 막기 위한 주거 정책이 절실하다는 것이 논문의 결론이다.

상대적 박탈감은 어떠한 수준까지는 경쟁심을 불러일으켜 “나도 더욱 벌어서 더욱 소비하겠다”는 태도의 동력이 된다. 하지만 불평등이 비현실적으로 심해지면 포기하는 심정에 가까워진다고 한다. 논문은 통계와 시민 응답을 바탕으로 현재 한국 집값의 격차가 특정한 임계점을 넘어섰다고 보고 있다. 부동산을 바라보는 시각이 ‘명품’에 대한 시각과 유사하다는 고찰도 있다. 사람들은 SNS에 있는 타인의 명품 소비를 처음에는 흉내내지만 정도가 심해지면 아예 외면한다.

논문을 작성한 진장익 중앙대 도시계획부동산학과 교수는 2019년 이후에도 박탈감이 계속 형성된다고 본다. 진 교수는 “현재 집값은 시장이 한창 부풀었던 2020년 수준으로, 계층이동 기대감이 여전히 낮다”고 말했다. 2020년 2·20 부동산규제 이후 시작된 풍선효과(비규제 지역으로의 집값 상승 열기 전환)로 인해 주택시장 불평등은 여전하다.

주택은 생애주기별 박탈감의 한 예일 뿐이다. 격차와 박탈감은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생애주기에서 목격된다. 패션·유통 마케터들은 한국인을 영유아 단계부터 VIB(Very Important Baby)와 그 밖의 아이들로 구분한다. 한 백화점 관계자는 “유년기부터 명품에 익숙해지면 자연스럽게 계속 소비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부모들은 자녀를 위한 과시적 소비 행렬에 무작정 동참하지 않겠다면서도 ‘애써도 따라갈 수 없는’ 현실을 동시에 인식하는 편이다. 명품 브랜드의 ‘키즈 라인’이 있는 서울 서초구의 한 유명 백화점 10층에서 만난 이들의 반응이었다. ‘버버리’ ‘펜디’ ‘몽클레르’ 등이 입점한 가운데 부모들의 이목을 끈 건 ‘디올 베이비’ 매장이었다. 남편과 함께 유아용품을 구매하러 방문했다는 A씨(40)는 “아이가 커도 명품 옷은 사주지 않겠다”고 말했다. A씨는 “삼대가 먹고살 재벌 집이 아닌 이상 계속 사줄 수는 없다”고 말했다.

유아용품의 소비 격차는 자녀의 성장과 함께 사교육 소비 격차로 이어진다. 통계청의 지난 1분기(1~4월) 가계동향조사에 따르면 소득 5분위(소득 상위 20%)의 월평균 교육비 지출은 58만4000원이었다. 이는 1분위(소득 하위 20%) 지출액인 3만4000원의 17배다. 경제 전문가들은 부모의 심정을 이해한다면서도 사교육이 과연 ‘승률 높은 투자’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라는 반응을 보인다. 한때 상위 계층의 교육 소비를 따라가던 이들 중 일부는 유학 등으로 이어지는 ‘장기 레이스’는 포기한다.


소득 상위권 틈에서는 사교육 소비 격차가 더욱 큰 폭으로 벌어진다. 국민일보는 유아대상 영어학원(영어유치원) 자녀를 보낸 학부모를 상대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바 있다. 영어유치원에 월 100만원을 쓴다고 응답한 가정의 월 소득은 평균 611만원이었다. 100만~150만원을 쓴다고 응답한 가정의 월 소득은 737만원, 150만~200만원을 쓰는 가정의 월 소득은 903만원, 200만~250만원을 쓰는 가정의 월 소득은 1275만원이었다.

사교육 소비 이후에는 결혼을 놓고 소비 격차가 두드러진다. 필수재인 집이 어느덧 사치재처럼 인식되기 시작한 것처럼 결혼 역시 더 이상 누구나 하는 통과의례가 아니다. 청년들이 비용 때문에 결혼을 망설인다는 분석은 더 이상 새롭지 않다. 결혼정보업체 듀오의 1~2년차 신혼부부 설문조사에 따르면 올해 총 결혼비용은 3억3050만원이다. 혼수와 예식홀 비용 등은 3년간 증가일로이며, 한국 결혼비용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전월세로 시작한 부부, 자가로 시작한 부부의 소비는 이후 생애주기에서 더욱 큰 격차로 벌어진다. 출산과 육아도 여력이 있어야 하는 일종의 소비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진 교수는 “취업, 결혼, 출산을 꺼리는 분위기는 (타인의 선택을 보고) 내가 그런 선택을 할 수 없겠다고 미리 판단한 결과”라고 말했다.

이슈&탐사팀 이택현 김지훈 정진영 이경원 기자 alle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