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커피 산업이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라선 데는 강원도에서 시작한 카페들의 공이 큽니다. 김연아 선수 전후로 한국 피겨 스케이팅의 위상이 달라진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지난 21일 오전 7시30분, 서울-양양 고속도로 위. 달리는 버스 안에서 마이크를 든 한 남성이 ‘강원도의 커피’에 대한 의견을 펼쳤다. 마이크까지 갖춘 이 남성의 말에 승객들은 이른 아침부터 진지한 얼굴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손에 든 한 묶음의 자료를 들춰보며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버스에서 좌중을 집중시킨 이 남성은 커피 칼럼니스트 심재범씨다. 버스에는 롯데백화점 문화센터의 여름 학기 강좌인 ‘커피 칼럼니스트와 함께하는 강릉 커피 여행’의 수강생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심씨는 한국커피협회 소속 바리스타이자 커피칼럼니스트로 ‘블루리본 서베이’의 스페셜티 커피 세미나를 코디네이팅하기도 했다. 커피 칼럼니스트와 커피 애호가들의 여행은 이렇게 시작됐다.
롯데백화점의 이 강좌는 ‘경험 소비’ 트렌드에 맞춰 백화점 안의 강의실에서 진행되는 정적인 수업을 벗어나 현장에서 펼쳐지는 체험강좌의 한 형태다. 롯데백화점은 강원도관광재단과 함께 ‘강원도 당일치기 여행’ 투어를 기획했고, 주제 가운데 하나로 ‘강원도의 커피’를 삼았다.
버스는 강릉의 ‘보헤미안 로스터스’ 앞에 정차했다. 보헤미안 로스터스는 ‘한국 핸드드립 커피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박이추씨가 만든 카페다. 한국 커피의 산실로 꼽히기도 한다. 수강생들은 곧장 로스팅실로 향했다. 보헤미안 로스터스 소속 황광우 실장의 안내로 60㎏의 원두를 볶을 수 있는 거대한 로스팅 기계를 살펴봤다. 1㎏에 최고 2000만원을 호가하기도 하는 게이샤 커피 생두의 향도 맡을 수 있었다.
핸드드립 실습이 이어졌다. 전면 유리창 가득 강릉 앞바다가 펼쳐진 실습장에 들어서자 수강생들 사이에서는 탄성이 터져나왔다. 그럼에도 이들에게 중요한 건 바다보다 커피였다. 이내 실습에 열중했다. 황 실장의 설명에 따라 손에 든 드립 포트에서 나오는 물줄기의 굵기와 속도를 바꿔가며 커피를 내렸다.
황 실장이 “성격이 급한 분이 내린 커피에선 쓴맛이, 여유로운 분이 내린 커피에선 신맛이 난다”고 하자 수강생들의 웃음이 터져나왔다. 수강생들은 자신의 커피와 다른 이의 커피를 번갈아 맛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박이추씨와의 깜짝 만남도 이뤄졌다. 계획된 일정은 아니었으나 카페에 출근한 박씨와 우연히 동선이 겹치며 성사됐다. 박씨가 나타나자 한 수강생은 두 손으로 입을 막으며 반가워했다. 연차를 내고 직장동료와 함께 투어에 참여한 이모(38)씨는 “그냥 손님으로 방문했다면 들어가지 못했을 로스팅실에 들어가 보고, 말로만 듣던 박이추씨를 직접 보게 됐다”며 “생생한 현장감 덕분에 휴가가 아깝지 않다”고 말했다.
점심시간에는 강릉중앙시장으로 자리를 옮겨 자유 식사시간을 가졌다. 저마다 강릉을 만끽할 기회가 주어졌다. 직장인 김건호(32)씨는 감자옹심이를 선택했다. 김씨는 식사를 마친 뒤 한 빵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김씨는 “여행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이틀 전부터 인터넷으로 검색한 맛집”이라며 즐거운 표정을 보였다.
수강생들은 경포호 둘레길에서 강릉을 즐길 수 있는 자유시간을 가진 뒤 카페 ‘346커피’에서 두 번째 수업을 가졌다. 이날 투어에 동행한 최이라 롯데백화점 ESG팀 문화센터 담당 리더는 “강원도의 ‘뮤지엄산’을 투어하는 강좌에서 수업이 너무 빡빡해 힘들다는 고객의 의견이 있었다”며 “이를 반영해 여유롭게 투어를 즐길 수 있도록 강좌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346커피’에서 다시 만난 수강생들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일렬로 앉았다. 수업을 위해 마련된 자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바다를 즐기며 수업을 들으려는 수강생들의 마음을 읽은 심 칼럼니스트가 수강생들 앞에서 자연스럽게 설명을 시작하며 강의가 이어졌다. 강릉 바다의 수평선과 스페셜티 커피의 이야기를 함께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백화점업계는 엔데믹 이후 체험 강좌를 강화하고 있다. 체험을 즐기는 20~30대가 문화센터 수강생으로 속속 채워졌다. 올해 롯데백화점 문화센터의 전체 수강생 중 20~30세대 비율은 55%로 절반을 넘었다. 코로나 이전인 2019년과 비교하면 20% 포인트 증가한 수치다.
롯데백화점 관계자는 “주 52시간제가 시작된 뒤 퇴근하고 강의를 들으러 오는 젊은 층이 늘었는데, 최근 외부 체험 강좌를 늘리면서 더 많은 20~30대 고객이 유입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백화점들이 문화센터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문화센터의 ‘록인 효과’ 때문이다. 문화센터 수업 때문에 정기적으로 방문하다 보면 백화점에 더 오래 머물게 된다. 이는 수치로도 확인된다. 지난해 롯데백화점 문화센터 회원의 구매 금액은 비회원 대비 5배 많았다. 김수민 롯데백화점 ESG팀 문화센터 담당 책임은 “비교적 진입 장벽이 낮은 ‘원데이 클래스’를 통해 정규 강좌로 유입되는 고객들이 많다”며 “앞으로도 다양한 이색 강의들을 선보일 계획”이라고 말했다.
강릉=글·사진 구정하 기자 g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