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비극에도… ‘출생통보제’ 감감

입력 2023-06-23 04:08
지난 21일 경기 수원의 한 아파트 내 냉장고에서 태어난 뒤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유령 아동’ 시신 2구가 발견되면서 ‘출생통보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사진은 서울 강서구의 한 산부인과 병원 신생아실 모습. 국민일보DB

태어난 뒤 출생신고가 되지 않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유령 아동’의 비극이 되풀이되고 있지만 제도개선은 수년째 제자리걸음인 상황이다. 2021년 경북 구미의 8세 여아 살해유기 사건 이후 정치권에서는 출생신고제를 강화하는 내용의 법안을 경쟁적으로 내놨지만 이후 국회 문턱을 넘은 법안은 전무하다. 최근의 ‘수원 영아 냉장고 유기’ 사건으로 출생통보제 도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다시 커지고 있다.

출생통보제 도입은 문재인정부에서도 논의됐다. 2019년 5월 발표된 ‘포용국가 아동정책’에서 아동의 출생통보제를 도입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2020년 12월 전남 여수에서 생후 2개월 된 아들이 질식으로 사망하자 냉장고에 유기한 사건이 발생했다. 출생신고도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근처에서 악취가 풍기는 것을 의심스럽게 여긴 주민의 신고로 2년 만에 범행이 드러났다. 세이브더칠드런 등 NGO를 중심으로 출생통보제 도입 움직임이 일었다.

2021년 2월 경북 구미에서도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3세 여아가 미라 상태로 발견됐다. 이어 친모에게 살해당한 8세 미등록 여아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자 출생신고제도를 손봐야 한다는 사회적 논의에 불이 붙었다. 정치권에서는 여야 할 것 없이 출생통보제 등 출생신고 의무자를 확대하는 내용의 가족관계등록법 개정안을 쏟아냈다. 법무부도 출생통보제를 골자로 하는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22일 현재 정부안을 포함해 21대 국회에 머물러 있는 관련 법안은 12건에 달한다. 하지만 모두 소관위원회 심사 단계에서 잠자고 있다.

특히 출생 관련 업무가 여러 기관에 흩어져 있다는 점이 문제로 꼽힌다. 가족관계등록은 법원이, 주민등록은 행정안전부, 아동복지 정책은 보건복지부, 출생신고는 각 관할 지방자치단체가 맡고 있다. 각 기관 사이 칸막이가 만들어낸 사각지대에 미등록 아동이 방치돼 있는 것이다.

의료계는 행정 부담을 이유로 반대한다. 병원이 건강보험심사평가원과 지자체에 이중으로 출생통보를 하는 행정 부담을 지게 된다는 이유다. 의료계는 심평원이 지자체에 출생통보 의무를 지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출생통보제를 도입하게 되면 병원이 아닌 외부에서 산모가 위험한 방식으로 출산을 하고 아이를 유기하는 일이 늘어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김희진 보편적출생신고네크워크 변호사는 “국회에 법무부의 입법예고안이 제출됐을 당시 의료계 반대 의견이 상당히 많았다”며 “그러나 출생통보제는 경제적 문제라든지 아이를 양육하기 어려운 가정에 필요한 지원을 정부가 빨리 파악할 수 있는 제도적 방안”이라고 말했다.

노혜련 숭실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부모가 신고하지 않으면 아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아이가 되는 것”이라며 “출생통보제 관련 법안이 국회를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어 “수원 영아 사건도 배경에 경제적 어려움이 있다고 하는데, 만일 출생통보제가 있었다면 다자녀가구 지원 등이 제공됐을 것”이라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이가현 백재연 기자 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