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미 박사의 성경 속 이야기] 느부갓네살의 꿈

입력 2023-06-27 03:05

신바벨론의 느부갓네살 2세(B.C 630년~B.C 562년)가 화려하게 등장한 역사적 무대는 지금의 ‘제라불루스’(Jerablus) 지역에서 벌어진 갈그미스 전투(The Battle of Carchemish, B.C. 605년)이다. 당시 애굽의 느고는 앗수르를 격파하고 근동의 패권을 장악해가던 신바벨론의 팽창을 막기 위해 북방진출을 꾀했다. 근데 상황을 오판한 남유다의 요시아가 그들 군대의 진입로를 차단하고자 이스르엘 평원의 요충지 므깃도에서 일전을 치렀다.(B.C 609년) 예루살렘 멸망 전 마지막 종교개혁의 영적부흥을 이끌었던, 젊고 유능한 왕(요시아)은 불운하게도 전사했다. 그의 죽음은 애굽의 내정간섭과 남유다의 몰락을 재촉하는 계기가 됐다.

이른바 갈그미스 전투는 신바벨론의 남하, 즉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및 동부 지중해 연안에 대한 주도권 쟁탈을 저지하고자 앗수르 잔존세력과 동맹을 맺은 애굽의 느고가 바벨론의 야심찬 느부갓네살 왕에 맞서 유프라테스강 서안 갈그미스에서 치열하게 격돌한 전쟁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근동 열강들에게 국제적 힘의 질서를 재부여했다.

한편 바벨론 군대는 애굽을 대파한 전승의 기세를 몰아 남유다를 공략한다.(B.C 605년, 느부갓네살 원년, 제1차 침공) 그 후 요시아의 아들이자 느부갓네살의 봉신인 여호야김이 친애굽정책을 고수하면서 반기를 들고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뒤이어 18세에 즉위한 여호야긴(역대기에는 8세로 소개됨)도 부왕의 반바벨론 입장을 취하면서 연거푸 배신한다. 대로한 느부갓네살은 유다를 재차 공격해 여호야긴을 폐위시키고 그의 숙부인 맛다니야(시드기야)를 왕으로 옹립한다.(B.C 597년, 제2차 침공)

일촉즉발의 위기 가운데 느부갓네살에 의해 보위에 오른 시드기야는 봉신국에 대한 충성서약을 약 8년간 이행했다. 그러나 (그는) 왕실 친애굽파의 회유와 주변 군소국가들(에돔과 두로, 시돈과 모압 등)의 설득에 의해 결국 반바벨론 군사동맹을 맺는다. 느부갓네살은 곧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그의 군대는 약 18개월 동안 파상공세를 퍼붓는 공성전을 벌이다가 마침내 북문성벽을 뚫었다.(B.C 588년 1월~B.C 587년 7월, 제3차 침공) 유다의 시드기야는 비참하게도 두 아들이 처형당하는 것을 목도해야 했고 자신도 두 눈이 뽑힌 채 쇠사슬에 묶여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예루살렘 성을 파괴한 느부갓네살이 다니엘서에 재등장한다. 바벨론 도성엔 유다에서 잡혀 온 시드기야의 친족, 네 명이 있었다. 이들은 다니엘(벨드사살)과 하나냐(사드락), 미사엘(메삭)과 아사랴(아벳느고)였다. 왕은 선택받은 유다 소년들에게 그의 식탁에서 식사하게 했고 갈대아의 학문과 언어 및 점성술을 배우고 익히게 했다. 제국을 잠재적으로 강성케 하려는 의도였다. 소위 ‘우수한 두뇌의 국외유출’이다. 근데 그들은 왕의 밥상을 걷어차고 이교도의 책상은 붙들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우상의 제물로 바쳐진 음식을 거부하기로 결단한다. 그들은 환관장, 아스부나스를 찾아가 왕의 진미와 포도주 대신 다른 음식(콩과 대추야자 및 채소)을 먹을 수 있도록 허락을 구한다. 열흘 동안 시험해 본 결과 그들의 얼굴이 왕의 기름진 음식을 먹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아름답고 피부(살)도 윤택해 보였다. 삼년 후 기한이 차서 감독관은 …(※전체 내용은 더미션 홈페이지(themission.co.kr)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