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투·도박·과소비하곤… “빚 탕감해 줘” [이슈&탐사]

입력 2023-06-23 04:04
법원통계월보에 따르면 개인회생 접수는 2021년 8만1030건에서 지난해 8만9965건으로 늘었다. 올 들어 지난달까지는 4만9665건이 접수됐는데 예년에 비해 많은 추세다. 대법원은 박영재 법원행정처 차장을 팀장으로 하는 종합대책팀을 구성, 도산사건 증가에의 대응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빚을 동반한 무리한 투자, 수입을 초과한 소비의 마지막 장면은 종종 호화로운 식당과 백화점이 아닌 법원에서 펼쳐진다. 채무를 감당할 능력이 없어진 이들이 법원에 개인파산·회생을 신청하는 것인데, 이러한 숫자는 매년 늘고 있다. 물론 빚 탕감 호소 속에는 불의의 사고, 가족의 실직, 보이스피싱 피해로 인한 사연도 포함된다.

법원 문턱에 이르는 개인도산 사건들에서는 한국사회 구성원이 돈을 어떻게 쓰는지, 왜 그렇게 쓰는지 거대한 흐름을 엿볼 수 있다. 오랜 기간 빚의 끝을 바라본 이들은 소비의 수준이 사람을 설명하는 세상이 됐다는 것, 양극화와 경기침체가 심화한다는 것, 노동과 저축의 가치는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었다. 부양가족이 없거나 적은 20대 젊은이들의 회생 신청 비중이 커진다는 점도 적신호로 인식됐다.

22일 국민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회생위원들은 개인회생의 주요한 신청 원인으로 가상자산 등 투자 실패, 온라인도박 등 불법적 투자, 수입에 비해 과도한 지출 등을 꼽았다. 이 가운데 가상자산 등 투자 실패로 인한 비중이 점점 커진다는 게 이들의 체감이었다. 서울회생법원은 연간보고서에서 ‘투자실패 또는 사기피해’로 인한 개인파산 신청 비중이 2019년 2.27%였으나 지난해 11.29%로 높아졌다고 밝힌 바 있다.

서울회생법원 외부회생위원인 김동영 변호사는 ‘수입에 비해 과도한 지출을 하는 사례’가 20%, ‘주식 및 가상자산 투자 실패로 인한 사례’가 20~30%, ‘온라인도박 등 불법적 투자와 관련된 사례’가 20%가량이라고 가늠했다. 그는 특히 ‘과도한 지출’ 부분에서 고액 사교육 세태 또한 엿보인다는 견해를 밝혔다. 수입 범위를 넘어선 카드빚으로 유명 학원에 돈을 내는 모습이 다수 발견된다는 것인데, 이 변제불능 사태들은 교육비 투자가 큰 가정의 현실과 서울 강남 중심 사교육 시장의 팽창까지 설명한다.

서울회생법원 내부회생위원인 송인원 법원사무관 역시 ‘가상자산 및 주식 투자 실패 사례’를 20%, ‘스포츠토토 등에 따른 사례’를 20%가량으로 헤아렸다. 송 회생위원은 ‘일반적이지 않은 소비 행태’가 40~50%가량으로 변제불능 사태의 기저를 이룬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가 설명한 ‘일반적이지 않은 소비 행태’에는 꼭 사치나 과소비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특이한 모습이 포함된다. 빚을 진 상태에서의 잦은 택시 이용, 인터넷 방송에서의 수백만원대 ‘별풍선’ 후원, ‘반복적인 굿’ 등이 조사된 때가 있었다고 한다.

서울회생법원은 ‘2022년 개인파산사건 통계조사 결과보고서’를 통해 ‘투자실패 또는 사기피해’로 인한 개인파산 신청 비중이 2019년 2.27%였으나 지난해 11.29%로 높아졌다고 밝힌 바 있다. 개인회생의 경우 그 동기가 명확한 수치로 관리되는 데 한계가 있다. 회생위원들은 가상자산 등의 투자실패로 인한 신청 비중이 확대되는 추세임을 체감한다고 했다. 고수익 위험자산 투자가 각광받는 원인 중 하나는 임금 저축과 부동산 가격의 격차로 분석되는데, 경제 전문가들은 이 현상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사치와 낭비성 행위의 비중은 과거와 비슷한 편이다. 회생위원들의 체감 속에서 비중이 커져온 변제불능 동기는 단연 가상자산과 주식 투자의 실패다. 이는 기본적으로 젊은층 중심으로 투자행위 자체가 확대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인데, 궁극적으로 양극화와 경기침체를 반영한다. 김 회생위원은 “젊은이들이 ‘월급으론 뭘 믿을 수 없다’ 싶어서 가상자산 등 투자에 큰 관심을 갖는 듯하다”고 말했다. 과거보다 양질의 일자리를 획득하는 일은 어려워졌고, 그나마 임금으로 집값에 도전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누군가가 큰돈을 쉽게 벌었다는 이야기들은 온라인에 넘치는 환경에 청년들이 놓였다는 얘기다.

회생법원에서 보이는 풍경 가운데 하나는 가계부채 고위험군으로 분류되는 자영업자들의 폐업 사례다. 김 회생위원은 이 부분이 개인회생 사건의 30%가량을 이룬다고 본다. 은퇴 이후 새로운 출발에 나선 중년과 창업 청년 등 자영업자들은 사무실·상점의 보증금과 인테리어 비용을 대개 빚으로 부담한다. 자영업자들의 도전은 가상자산 투자보다는 승률이 높지만 은행의 사업자대출 이자를 꼬박꼬박 갚을 만큼 성공하는 이는 적다. 김 회생위원은 “돈을 버는 이들은 10~20% 정도이고, 약 70%는 실패하는 듯하다”고 말했다.

채무자들의 빚 탕감 요청은 따뜻한 시선을 받지 못한다. 기본적으로 채무자가 이익을 얻고 손실은 채권자가 부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 경제 자체가 가계부채를 통해 성장해 왔다는 점, 도산제도를 통한 채무자의 신속한 경제활동 복귀가 사회 전체의 이익이라는 점을 모두 이해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져 왔다. 한 수도권 부장판사는 “파산·회생제도는 ‘감기’가 온 나라의 ‘폐렴’으로 진행하지 않도록 막자는 것이며, 모두의 피해를 막는 과정에서 선량한 손해와 양보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국가가 개인의 유혹·위험 노출을 막을 수 있는 조치를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중독적 행위의 결과를 개인 책임으로만 돌리기에는 채무자들을 부추겨 이익을 거두는 구조 역시 분명 존재한다는 것이다. 대포통장을 동반한 불법적인 온라인도박은 좀체 근절되지 않으며 ‘손쉬운 대출’ 광고는 온갖 수단으로 사람들을 향한다. 쉽게 많이 탕감받는 기술이 있다고 속삭이는 회생브로커도 있고, 법률사무소들은 변제율 하향 사례를 실적처럼 제시한다. 청년들은 이제 “빚 못 갚으면 회생하면 된다”고 말하고 있다.

법관으로 개인파산·회생 사건을 담당한 경험이 있는 서정원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온라인을 통해 접근이 용이한 행위의 경우 이를 개인의 의지에만 맡기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서 교수는 “특히 온라인도박의 경우 도박장의 개설행위나 도박행위는 형사상 범죄에 해당하고, 그에 이용되는 대포통장의 제공행위 역시 전자금융거래법 위반죄를 구성한다”며 “온라인도박에 노출되는 기회가 제한되도록 형사적 규제 등 사회적 노력이 함께 필요하다”고 했다.

이슈&탐사팀 정진영 김지훈 이택현 이경원 기자 yo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