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일종의 국뽕

입력 2023-06-23 04:02

애국심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별생각은 없는 편이었다. 평소에 심각하게 고민하는 주제도 아니었던 데다 공간이 주는 스트레스와 압박이 늘 싫었다. 삶의 시기를 불문하고 재미와 여유보단 쉼 없는 일상과 끝없고 막연한 의무 혹은 책임이 있는 곳, 서울이었다.

나와 똑같이 찌든 사람들과 정신없는 풍경, 제도나 정치에 대한 실망과 딱히 기대할 것 없는 내일 아침은 ‘언제든 벗어날 수 있다면 벗어나야지’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대한민국 국민의 행복지수가 낮은 건 너무 당연해 보였다. 다른 나라 사람을 만나면 부끄러운 건 있어도 딱히 자랑하고 싶은 건 없었다.

지금은 조금 다르다. 외국 사람을 만나면 영화든 드라마든 음악이든 한 가지 주제는 ‘한국이 잘한다’는 이야기로 이어갈 수 있다. 지난해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만난 아이돌 지망생은 꼭 한국의 연예기획사에서 데뷔하고 싶다고 말했고, 싱가포르의 한 카페 직원은 내가 보지 못한 한국 드라마를 얘기하며 주연 배우의 안부를 물었다. 얼마 전 여의도에서 마주친 한 외신 기자는 국내 작품의 제작발표회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까지 왔다고 했다.

내로라하는 해외 아티스트들이 요즘 매달 한국에 온다. 애니메이션 거장 신카이 마코토 감독, ‘팝 아이콘’ 해리 스타일스가 한국을 찾았다. 홍콩 배우 견자단과 일본 청춘스타 고마츠 나나 등의 내한도 이어졌다. 지난주 ‘21세기 마이클 잭슨’ 브루노 마스의 내한 공연이 있었고 다음 주엔 톰 크루즈가 지난해에 이어 내한한다. 7월 첫 주엔 영화 ‘바비’를 들고 배우 라이언 고슬링과 마고 로비, 그레타 거윅 감독이 한국을 방문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해외 아티스트들이 아시아 투어 일정에서 서울은 패스하고 일본 도쿄로 향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상징적인 측면에서 크게 중요하게 여겨지진 않은 탓이다. 지금은 한국을 빼놓지 않고, 심지어 제일 처음 들르며 ‘세계 문화의 중심지’라는 말을 심심찮게 한다. 지난 4월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볼륨 3’ 개봉을 앞두고 한국을 찾은 제임스 건 감독은 “영화 산업은 계속 변화하며 시기마다 특성이 있다. 지난 10년 이상의 기간 세계 영화사에서 한국 영화는 최고 수준이었다”고 말했다. 해외 콘텐츠업계 관계자들은 “세계 대중문화 시장에서 한국의 반응이나 평가는 중요하다. 특히 아시아에서 한국의 문화적 위상은 독보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국내 작품에 대한 해외 인사들의 극찬 속에서 역설적이게도 한국 영화계는 암흑기에 있다. 이병헌 박해일 전도연 송강호를 동원해도 관객 수 100만명을 넘길 수 있을지 마음 졸여야 한다는 건 꽤 의미심장한 일이다. 대중이 문화를 소비하는 방식이 변한 것도 사실이지만 콘텐츠들이 예전보다 값어치를 인정받지 못한다는 쓰린 현실도 부인할 수 없다.

한류가 전성기를 맞았다는 칭찬의 뒷면엔 이제 내리막길을 내달릴 수도 있다는 경고가 있다. 앞으로의 과제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지키고 발전시킬 의지가 있다는 걸 보여주는 일이다. 지속적인 투자와 수익 없이 좋은 결과물을 기대할 수는 없다. 대중의 관심과 응원도, 정부와 문화계의 고민과 위기의식도 때를 놓치지 않았으면 한다.

그렇다고 이제 내게 애국심이 충만하단 얘긴 아니다. 그래도 순간순간 취재 현장에서 느낀 건 (그렇게도 질색하던) 일종의 국뽕이었던 것 같다. BTS의 인기가 오른다고, 봉준호 감독의 영화가 더 잘 팔린다고 사람들의 일상에 숨통이 트이는 건 아니다. 하지만 사소하고 꾸준한 자긍심이 여러모로 절망감을 학습해 온 이들에게 조금의 위안은 될 수 있다는 걸 난 목격하고 있다.

임세정 문화체육부 차장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