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생법원 문턱에 이르는 개인파산·회생 사례들에서 엿볼 수 있듯 미래가 어둡다는 이유로 벌어지는 초고가 소비와 위험 투자의 일부는 가계부채와 결합하고 있다. 한국의 가계부채는 총량이 크지만 상당 부분 주택자금과 관련돼 있어 부채의 질 자체가 나쁘지는 않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소비의 양극화와 투자 실패, 경기침체는 청년과 자영업자 등 가계부채 고위험군의 타격을 심화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우려했다.
올해 들어 한국이 받은 가계부채 성적표는 우려스러운 수준이다. 지난달 말 발표된 국제금융협회(IIF)의 세계 부채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올 1분기 기준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비율이 102.2%로 조사대상 34개국(유로 지역은 단일 통계) 가운데 가장 높았다. 가계부채가 경제 규모를 넘어선 국가는 한국이 유일했다.
최근 금융권에서는 가계부채의 ‘9월 위기설’도 흘러나왔다. 9월이 되면 기존의 코로나19 피해 소상공인·중소기업 대출 만기연장 및 원금·이자상환 유예 조치가 종료되는 여파가 나타나고, 대규모 부실이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다. 금융 당국은 “부실 가능성이 높은 대출은 극소수”라는 입장이지만 촘촘한 관리가 필요하다는 지적은 계속된다.
이런 환경 속에서 벌어지는 초고가 소비의 증가, 가상자산 등 위험자산 투자 확대 경향은 한국 경제의 적신호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기준금리가 낮을 때에는 빚을 내 여러 자산시장에 투자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평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 금리가 높아졌고, 경제성장률은 연 1%대에 멈춰 있다. 달라진 환경에서 나오는 분석은 “수년 사이 각 개인은 시장에서 합리적인 선택을 했지만 사회 전체는 비합리적 결론에 도달한 ‘구성의 오류’가 벌어졌다”는 것이다.
향후 경제를 지탱해야 할 젊은 세대가 빚을 더 빨리, 더 많이 지는 추세는 우려를 더한다. 청년층의 부채 증가 원인으로는 한동안 이어진 저금리 기조, 인터넷전문은행을 중심으로 높아진 대출 접근성이 지목되고 있다. ‘손쉬운 대출’은 청년들의 가상자산 투자 열풍의 한 원동력으로도 꼽힌다. 인터넷은행의 대출 확대는 비트코인 등 가상자산 가격의 폭등과 엇비슷한 궤적을 그렸기 때문이다.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실이 금융감독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국내에서 영업 중인 3대 인터넷은행의 신용대출 잔액은 지난해 말 기준 28조1969억원을 기록했다. 은행별로 보면 카카오뱅크의 잔액이 12조7627억원으로 가장 많았고 케이뱅크(8조2718억원), 2021년 10월 은행업을 개시한 토스뱅크(7조1624억원)가 뒤를 이었다. 전반적으로 5년 만에 3.3배 성장한 수치다.
2018년 48만5000명이던 인터넷은행 차주는 지난해 169만8000명으로 대폭 늘었다. 최근 5년 사이 새로 빚을 진 이만 120만명을 넘는 셈이다. 신규 차주 중에서는 청년층 비중이 크고, 가상자산 시장의 성장과 인터넷은행의 대출을 따로 떼어 볼 수 없다는 해석이 제기된다. 카카오뱅크의 경우 20대 이하 신용대출 차주가 2019년 23만명에서 지난해 말 204만명으로 9배가 됐다. 류두진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는 22일 “시중은행에 비해 간단한 인터넷은행 대출 프로세스가 가상자산 ‘빚투’(빚내서 투자)를 부추겼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가상자산 시장은 2020년 비트코인 급등과 함께 호황이 찾아왔었다. 국내 가상자산 거래소 업비트에 따르면 비트코인 시세는 2020년 10월부터 한 달에 수십%씩 상승을 거듭해 2021년 11월 사상 최고가(8270만원)를 기록했다. 이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글로벌 기준금리 인상으로 인해 예년의 ‘불장’은 사라졌지만 청년층의 가상자산 투자 선호 현상은 꾸준한 편이다. 금융정보분석원(FIU)에 따르면 가상자산 시장의 일평균 거래액은 지난해 하반기 기준 3조원에 달한다.
카카오뱅크는 수년 전부터 최대 300만원을 빌려주는 ‘비상금대출’을 선보여 대학생 등 젊은층으로부터 인기를 끌었다. 케이뱅크와 토스뱅크도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비대면·무서류 신용대출을 손쉽게 내준다. 가상자산 투자 학생 다수를 상담한 경험이 있는 홍기훈 홍익대 경영학부 교수는 청년층의 인터넷은행 대출금 가운데 5조~7조원가량이 가상자산 시장에 투입됐다고 추산한다. 홍 교수는 “투자에 쓸 돈을 쉽게 당길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것”이라고 했다.
‘빚이 없어야 좋다’는 생각은 어느 정도 옳지만 전체 경제의 움직임을 설명할 수는 없다. 오늘날의 경제구조는 가계부채의 확대로 성장을 모색하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다만 경제 크기에 비해 큰 부채, 쉽게 늘어난 부채는 언제든 터질 수 있는 폭탄이다. 유경원 상명대 경제금융학부 교수는 “경제를 받쳐줘야 할 20, 30대들이 빚을 지고 있고 부채를 지는 시기가 너무 빨라졌다”고 우려했다. 유 교수는 “가계부채는 리스크를 다 연결하고 있다. 실리콘밸리은행(SVB) 사태에서 봤듯 (리스크가) 한 번 터지면 금세 패닉 상태가 올 수 있다”고 했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자신의 경제 수준에 맞게 소비를 하고, 이자와 원금을 갚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대출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유 교수는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업이 성과급 잔치를 할 게 아니라 대손충당금을 더 쌓아두는 등 리스크 예방에 돈을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슈&탐사팀 정진영 김지훈 이택현 이경원 기자 yo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