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 배상금이 1300억여원으로 결정된 것을 놓고 ‘선방했다’는 평가와 ‘아쉽다’는 반론이 엇갈린다. 법조계에선 박근혜정부 당시 정치권 개입으로 삼성물산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보았다는 엘리엇 측 주장이 어느 정도 받아들여졌을 가능성을 크게 본다. 배상금 규모와 별개로, 정경유착이 국경을 넘은 손해배상 책임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점을 자성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21일 법무부에 따르면 중재판정부는 전날 한국 정부에 5358만 달러(약 690억원)와 지연이자, 법률 비용 2890만 달러(372억여원)를 엘리엇 측에 지급하라고 통보했다. 엘리엇 측은 “정부 관료와 재벌 유착으로 소수 주주가 손실을 보았다는 사실이 재차 확인됐다”며 “이는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검찰 재직 당시 수사 및 형사 절차를 통해 이미 입증한 사실”이라는 입장문을 냈다.
전문가들은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의 유죄 판결이 영향을 줬을 것으로 본다. 문 전 장관과 홍완선 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은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에 부당한 압력을 가한 혐의로 기소됐고, 대법원에서 지난해 유죄가 확정됐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번 결과는) 국민연금 합병 찬성 결정이 엘리엇에 손해를 끼쳤다는 것을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며 “문 전 장관 등에 대한 유죄 확정판결이 결정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최원목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국민연금 개입으로 주주가치 훼손이 야기됐는지가 주요 쟁점”이라며 “이 부분에서 우리 책임이 인정된 것이라면 선방을 했다고 보긴 어렵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는 주주로서 국민연금의 권리 행사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어떤 의무도 위반하지 않았다고 맞섰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배상 책임이 인정된 점을 두고 곽경직 변호사는 “주주가 다른 주주와 다른 방향으로 의결했다고 책임을 지는 경우가 있나”며 “같은 주식을 같은 목적으로 들고 있던 한국인 주주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권리가 엘리엇에게만 인정된 셈”이라고 지적했다.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과정을 문제 삼는 유사 사건에서 앞으로 정부가 불리해질 수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최 교수는 “유사하게 제소가 이뤄진다면 이번 사건을 선례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이번 판정을 계기로 정경유착에 대한 경각심을 높여야 한다는 제언과 관련자들을 상대로 한 구상권 청구 필요성도 거론된다. 정부는 판정문 분석 후 취소소송 등 후속 조치 방향을 결정할 계획이다.
임주언 신지호 기자 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