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끝난 지 80년을 눈앞에 두고 있으나 한·일 관계는 여전히 미묘하고, 우리 사회는 친일 문제로 시끄럽다. 교과서에 나오는 해방은 하나이지만 당시나 지금이나 해방이 모두에게 같은 의미는 아닌 게 문제다.
해방이 되던 1945년 8월 이 땅에는 100만명 가까운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하루아침에 식민지 지배자에서 패전국 국민 신세가 됐다. 그렇다면 이들 일본인은 모두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아니었다. 사람마다 달랐다. 일본으로 돌아갈 교통편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부유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조선인과 가깝게 살았던 일본인들과 그렇지 않았던 일본인들 사이에도 해방 공간에서 느꼈던 공포감에는 차이가 있었다.
일제 강점기가 끝난 것이 조선에 살던 일본인들에게 같은 의미가 아니었듯이 조선 사람들에게도 같은 의미는 아니었다. 일본인들에게서 핍박을 받던 조선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좋은 일이었지만, 일본인들과 함께 편안함을 누리던 조선인들에게는 불행이었다. 해방 공간에서 조선 사람들에게 보복을 당한 사람 숫자에서 일본인보다 조선인이 더 많았던 배경이다.
같은 상황은 일본에서도 벌어졌다. 해방 즈음 일본에 거주하던 조선인은 200만명에 달했다. 자발적 이주나 징용·징병에 의해 일본에 머물던 조선인 등이었다. 그들도 선택이 어려웠던 것은 조선 거주 일본인들과 다르지 않았다. 해방된 조선이 그들 모두에게 같은 의미는 아니었다. 대부분의 재일 조선인들 앞에 놓여 있는 길은 다양했지만 그래도 선택은 할 수 있었다. 지켜야 할 일이나 재산이 있는 사람들은 남는 것이 길이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대한해협을 건너는 것이 길이었다. 강제로 옮겨진 사람들은 끌려온 길을 되짚어 제자리로 돌아가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이들의 선택을 어렵게 만든 것은 높아져 가던 분단의 벽이었다. 해방된 조국이 그들의 길을 막았고, 지금도 여전히 그들의 삶을 힘들게 하고 있다.
선택의 시간에 길을 찾기 어려웠던 또 다른 재일 조선인들이 있었다. 이왕가 일족이었다. 이왕가는 일본 항복 이전까지 일본 화족(백작 등 귀족)에 편입돼 일본 국고로부터 적지 않은 생활비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일부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 패망으로 이런 지원이 모두 중단됐다. 이들도 선택의 길 앞에 섰다.
이들이 선택한 길 중 하나는 다방을 여는 것이었다. 조선일보 1947년 2월 26일자를 보면 ‘전 이왕가의 최근 소식, 동경서 다방 경영’이란 기사가 보인다. 마이니치 신문 보도를 인용한 이 기사에 따르면 이왕가 일족은 도쿄(동경) 시부야에서 카페를 차렸다. 종래의 생명선이었던 일본 국고보조금이 끊어졌기 때문에 선택한 길이 커피를 파는 일이었다. 시종하던 사람들을 고용원으로 썼다. 상궁과 나인이 웨이트리스가 됐다. 먹고살기 어려울 때 카페를 차리는 것, 그때나 지금이나 왕후장상이나 서인이나 차이가 없다. 역사 속 희극이며 비극이다.
이길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육학과 교수 leegs@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