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오 이시구로는 한때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직장인처럼 착실하게 앉아 글을 썼다고 한다. 오후 4시 이전에는 전화나 이메일도 받지 않고 독하게 글만 썼기 때문에 그런 놀라운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일까. J D 샐린저 같은 전설적 소설가도 매일 아침 6시면 일어나 글을 쓰는 부지런쟁이였고, ‘시녀 이야기’라는 소설을 북미에서만 1000만부나 팔아치운 마거릿 애투드도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는 꼬박 앉아서 글만 썼다고 한다. 글을 쓰고 싶은데 직장도 다녀야 하고 살림도 해야 하는 당신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하루 종일 글만 써도 되는 작가들의 처지가 무한정 부러울 것이다.
하지만 작가들이라고 다 그런 건 아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인세 수입만으로는 생활비를 충당할 수 없어 다른 직업을 가지는 경우가 흔하다. 그리고 책상 앞에 앉아야만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작가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물론 누구나 책상 앞에 앉아야 비로소 원고 작성이 가능하긴 하지만 그건 그동안의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일 뿐이다. 아무것도 쓸 게 없는 상태에서 책상 앞에 앉으면 머릿속이 하얘질 뿐이다.
아이디어를 내기에 가장 좋은 것은 단순노동을 하는 것이다. 열 권도 넘는 초단편소설집으로 일가를 이루고 있는 김동식 작가는 중학교를 졸업한 뒤 10년 동안 주물공장에서 단순노동을 하며 지냈다. 하루 종일 국자로 아연을 떠서 도금 작업을 하던 그는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했고 그걸 매일 인터넷 게시판에 올렸다가 촉이 좋은 편집자의 눈에 띄는 바람에 작가가 됐다. 하지만 작가가 되기 위해 너도나도 주물공장으로 달려갈 필요는 없다.
내가 아는 작가들은 대개 걷거나 돌아다니면서 쓴다. 그중에도 베스트셀러 소설 ‘불편한 편의점’을 쓴 김호연 작가는 ‘팔을 다치면 글을 쓸 수 있지만 다리를 다치면 쓸 수 없다’라고 말할 정도로 산책 옹호자다. 걸으면서 떠오르는 아이디어들이 글이 되고 스토리텔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따져 봐도 걸으면 전두엽이 자극되고 그 자극으로 도파민이 생성되는데 그 물질이 생각을 하게 만든다. 결국 작가에게 걷는 건 쓰는 것과 같은 행위와 같다.
“나는 하루 종일 걸었는데 왜 글이 안 써지냐”라고 항의하는 당신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왜 그럴까. 걷기만 하고 메모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도 머릿속에만 저장됐다가 사라지면 말짱 도루묵이다. 그래서 나는 산책을 나갈 때면 반드시 A4지를 두 번 접어 가방에 넣고 볼펜도 챙긴다. 언제 어디서 이상한 생각이 떠오를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필기구가 있어도 길에서 메모하는 건 어렵다고? 그럼 스마트폰에 녹음을 하면 된다.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중 녹음 기능을 누르고 아무렇게나 목소리를 남긴다. 어차피 나중에 당신 혼자 들을 테니 횡설수설해도 되고 심지어 속어를 쓰거나 욕을 해도 된다. 다만 그날이나 그다음 날 저녁엔 꼭 다시 듣고 글로 옮겨놓기 바란다. 목소리를 글로 옮기는 과정이 있어야 아이디어가 쓸 만한 건지 아닌지 판가름 난다. 그리고 너무 오래 묵혀두면 나중에 그걸 왜 녹음했는지는 잊어버리고 녹음을 한 당시의 상황만 기억나기도 한다.
‘작가는 인테리어 디자이너라기보다는 건축설계사다’(어니스트 헤밍웨이), ‘영감이란 매일 일하는 것이다’(샤를 보들레르), ‘라파엘처럼 그리는 데 4년이 걸렸지만 아이처럼 그리는 데는 평생이 걸렸다’(파블로 피카소), ‘4시에 글을 쓰기로 결심했으면 4시에 글을 써야 한다! 어떤 핑계도 통하지 않는다’(도로시아 브랜디).
지금 메모장을 뒤져 찾아낸 ‘글쓰기 명언’들이다. 사실 이런 걸 메모해 놓았다고 당장 다 써먹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런 걸 메모해 놓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중 누가 더 좋은 글을 쓸 확률이 높을까 생각해 보면 단연 전자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최근에 나는 아내와 아내 친구 이렇게 셋이 술을 마시다 처녀 시절 너무 지분거리는 남자가 많아 가짜 청첩장을 만들었던 여자분 이야기를 듣고 화장실에 가서 ‘가짜 청첩장 만든 그녀. 대한민국에서 예쁜 직장 여성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라는 메모를 했다. 이게 어떤 글로 발전할지는 나도 모른다. 다만 오줌을 누면서도 쓴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쓰는 놈에겐 못 당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