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바깥에, 곧 내가 더 이상 보지도 못하는 삶과 관습과 사유의 한계 바깥에 설 수 있게 한다.” 프랑스 철학자 프랑수아 줄리앙의 ‘탈합치’(교유서가)를 바젤 기차역에서 읽는데 이 문장이 마음에 박혔다. 그랬다. 스위스 바젤로의 출장은 이 문장처럼 한국 사회 바깥에 서서 한국 사회를 들여다보게 했다.
출장의 목적은 세계 최대 규모인 바젤아트페어를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피카소, 루이스 부르주아 등 미술사 거장들의 수십억원, 수백억원대 작품 거래가 이뤄지는 아트페어 자체도 볼거리였다. 정작 내 마음을 더 끄는 것은 바젤에 스며 있는 스위스의 문화와 가치였다. 그곳에 가서야 우리가, 한국 사회가 거울을 들여다보듯 보였다.
우선 장애인 접근권이 일상생활에서 보장되는 문화는 부끄러운 마음이 들게 했다. 몇 년 전 베니스비엔날레 전시장에서도 ‘휠체어 관객’을 어렵지 않게 만났지만 바젤아트페어 행사장에서도 마찬가지로 휠체어 관객을 이따금 만났다.
한국에서는 마트에서 장을 보거나 전시장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장애인을 만난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만큼 계단이나 횡단보도 턱으로 인해 교통 약자들의 바깥나들이가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해외여행을 할 때는 그들의 마음을 아주 조금이나마 간접 체험하게 된다. 집을 나서서 무거운 여행용 캐리어를 들고 지하철까지 가기 위해서는 어느 순간 바퀴를 밀고 갈 수 없는 계단이나 보행 턱을 만나는 바람에 캐리어를 번쩍 들고 낑낑대는 순간이 자주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다. 트램은 도로와 차량 바닥까지 높이 차이가 별로 안 나 일반 시민은 물론 장애인, 고령자, 임산부, 영유아 등 교통 약자들도 편리하게 탈 수 있었다. 길에는 보행 턱이 있긴 하지만 어느 지점에서는 이동이 수월하도록 턱을 매끈하게 없앴다. 때문에 캐리어를 끌고 가면서도 곧 턱이 없는 노면이 나타날 거라는 믿음에 긴장감이 가셨다. 교통 약자들에게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자신을 반드시 챙겨준다는 믿음을 주는 사회가 멋있어 보였다. 아직도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처절한 이동권 투쟁이 일어나는 한국이 ‘야만의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는 환경 문제에 대한 고민과 실천이다. 지친 다리를 쉬기 위해 스탠드에 서서 맥주 한잔과 소시지를 먹을 때였다. 당연히 제공받아야 할 포크가 없어 노점 주인에게 물었더니 환경 문제 때문에 포크는 제공하지 않는다는 안내판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다른 손님을 보니 모두 냅킨으로 싸서 먹고 있었다. ‘아차, 그렇구나’ 싶었다. 굳이 플라스틱 포크와 나이프가 없어도 휴지에 싸서 한 입씩 베어 물면 될 일에 플라스틱을 소비해 왔던 것이다.
또 인터넷으로 기차를 예매했더니 노선을 안내해주며 구간별 탄소 배출량을 표시해준다. 물론 기차가 자동차보다 탄소 배출량이 적겠지만 그렇게 표시해줌으로써 탄소중립 실천의 필요성을 새삼 자각하게 만든다. 일종의 ‘넛지 효과’인 것이다.
세 번째는 대중교통이 주는 쾌적함이다. 그 기분은 무엇보다 똑똑한 행선지 안내 표시가 주는 시원한 느낌에서 비롯됐다. 행선지 안내가 얼마나 단순 명쾌한지. 다음 노선뿐 아니라 그 이후 3개 노선, 그리고 종착지를 표시하기에 내가 어디쯤 가고 있는지 가늠이 가능했다. 서울교통공사가 제발 견학 와서 그대로만 따라해 줬으면 싶었다. 또 트램에는 광고가 없었다. 대한민국은 광고의 홍수다. 택시를 타도 운전석 옆 좌석 뒷면에 광고판을 매달아 숨이 턱 막힌다. 광고가 너무 많다 보니 정작 어느 광고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데도 말이다.
선진국은 국민소득만 높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스위스를 통해 한국을 들여다보면서 우리가 문화적으로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됐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