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닮은 순교… ‘영광’의 유산으로 빛나다

입력 2023-06-24 03:01

진달래꽃 필 무렵, 전남 영광 법성포 앞 칠산바다에서 잡힌 참조기를 천일염으로 염장한 뒤 바닷바람에 말린 굴비는 예로부터 1000년 넘게 임금님 밥상에 진상됐다. 하지만 70여년 전 마치 굴비처럼 단단한 포승줄에 묶인 채 끌려가다 참혹하게 순교한 이들의 이야기가 어항(漁港) 마을 곳곳에 어려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94명. 1950년 6·25전쟁 당시 목숨을 잃은 영광 지역 기독교인 숫자다. 우리나라 최대 기독교 순교지로 기록된 곳.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찾아간 아픔의 마을에서는 여전히 순교 신앙을 품은 채 살아가는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6·25전쟁 발발 3년 후인 1953년 6월 고(故) 장기탁 법성교회 장로가 성도들과 함께 유흥주점으로 사용되던 공간을 예배당으로 재건하는 모습. 법성교회 제공

순교의 피, 경종을 울리다

“마을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얘기가 있어요. 예배 시작을 알리는 종이 나흘 동안 스스로 울리더랍니다. 마치 공습 대피 경보음처럼요. 기이한 종소리를 이상하게 여긴 주민들이 짐을 싸서 마을을 떠나기 시작했는데 딱 열흘 뒤에 인민군이 쳐들어왔어요. 1950년 9월 13일. 인민군들이 고(故) 김종인 목사님을 대사고개라는 곳으로 끌고 가서는 양잿물을 입에 가득 부었지요. 목사님이 양잿물을 머금은 채 삼키질 않자 목을 칼로 내리쳤답니다. 피란길을 떠나라고 마을 사람들이 아무리 성화를 해도 교회와 성도들을 돌보겠다고 꿈쩍 않던 목회자의 마지막 모습이었죠.”

이병화 법성교회 목사가 지난 20일 교회 내 순교기념관에서 6·25전쟁 당시 인민군에 의해 순교한 성도들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모습.

지난 20일 법성교회 순교기념관에서 만난 이병화(50) 목사는 전쟁 당시 이 공동체를 이끌었던 신앙 선조들의 이야기를 나지막하게 전했다. 쌀 소금 목화 누에고치가 많아 사백(四白)의 고장으로 불린다는 영광이 핏빛으로 물든 가슴 아픈 역사였다. 공산주의에 반하는 이들을 색출하던 인민군들의 기세는 김 목사의 죽음 이후 더 거세졌다.

인민군에게 붙잡혀 고초를 당하면서도 신앙의 끈을 놓지 않았던 성도들은 온몸이 죽창에 찔린 채 언목산 아랫자락 바닷물이 드나들며 만들어진 둠벙(움푹 파여 물이 괴어 있는 곳)에 버려졌다. 참혹한 아버지의 죽음을 듣고 “공산당은 물러가라”를 외치던 김 목사의 딸 순화씨도 그중 하나였다.

이 목사는 “굴비는 법성포로 유배된 고려의 문신 이자겸이 인종에게 말린 조기를 진상하며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뜻으로 아닐 비(非) 굽힐 굴(屈) 자를 쓴 데서 유래한다”며 “죽창 앞에서 목숨 걸고 신앙을 지켰던 선조들의 정신이야말로 천국에 올리는 진상품이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피란둥이로 태어난 송동필(72) 장로는 유년 시절부터 인이 박이도록 들어온 상처 깃든 이야기를 품고 살아가고 있었다. “10남매 중 셋째 아들로 1950~60년대를 살았어요. 학교가 없던 시절 어머니는 선교사님께 글을 배우셨지요. 인민군에게 끌려갔다가 기적처럼 빠져나오지 않았다면 저희 아버지도 아마 죽창을 피하지 못하셨을 겁니다.”

순교 신앙, 무너진 제단을 다시 쌓다
법성교회 순교기념관에 전시된 72년 전 성도들의 순교 관련 문서들. 법성교회 제공

그렇게 순교한 이들이 법성교회에만 20여명. 한국교회 사상 단일 교회 최다 순교지로 알려진 염산교회(77명) 야월교회(65명)에 비하면 적은 수지만 법성의 공동체가 전쟁 후 보여준 우직한 신앙심의 깊이는 결코 얕지 않다.

전쟁이 끝나고 상흔이 남은 땅엔 침묵이 이어졌다. 살아남은 주민들에게 교회와 십자가는 곧 ‘죽음’을 뜻했다. 하지만 복음의 회복을 결단한 이들의 의지는 총칼보다 강했다. 순교한 김 목사와 함께 법성교회를 이끌던 장기탁 장로는 성도들을 결집해 유흥주점으로 쓰이던 해월루를 매입하고 예배당으로 리모델링했다.

송 장로는 “장 장로님은 상처투성이었던 마을에서 어린이들을 교육할 수 있는 학원을 만들고 기똥찬 입담으로 동네 아이들이 주일학교에 모이게 했던 영적 리더였다”고 회상했다. 이어 “교회 다닌다는 이유로 아내와 자녀를 잃고도 다시 복음의 제단을 회복시키려 사력을 다하는 장로님의 모습이야말로 법성의 공동체가 지켜가야 할 순교 신앙의 모체”라고 덧붙였다.

이 목사는 “선조들이 순교의 피를 흘려가며 신앙을 지켰다면 이 시대 우리는 ‘백색(白色) 순교’의 사명을 지고 살아가는 것”이라며 “코로나19 팬데믹을 지나며 깎여나간 신뢰, 문화적 전쟁을 치르며 덧입혀진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삶과 행동으로 전환시키는 게 믿음의 성도들이 지향해야 할 순교 정신”이라고 말했다.

엔데믹 시대에 품어야 할 순교 신앙은
법성교회 입구에 마련된 순교기념비.

한국교회 130년 역사가 일궈낸 다양한 열매의 바탕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핍박을 받으면서도 순교의 피로 뿌려진 복음의 씨앗에 있다. 예배 중 들이닥친 공산군에게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면서도 공산군의 용서를 비는 기도를 드렸던 이판일 임자진리교회 장로, 인민재판에 회부된 후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학살당한 전남 영암읍교회 성도들.

전쟁이 가져온 암흑 같은 어둠 속에서 목숨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이들 모두는 하나님을 향한 결단을 품은 자리에 세상의 어떤 무엇도 대신할 수 없음을 삶으로 보여줬다.

정영택 한국교회순교자기념사업회 이사장은 “고대 그리스어 ‘마르투스’가 순교자(martyr)와 증인(witness)의 두 가지 뜻을 지니는 이유는 신앙을 품은 이들에게 삶을 바쳐 복음을 증거해야 하는 사명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엔데믹 시대에 성도들이 잊고 지냈던 순교 신앙의 이정표를 다시 세워나가기 위해 필요한 자세를 소개했다.

“성도들이 순교자를 기리는 수준을 넘어 실존으로서의 순교 신앙을 펼쳐내야 합니다. 일상에서 내 의견에 반대하거나 나를 핍박하는 사람들에 대한 대응이 역공과 비난이어선 안 됩니다. 온유함이 필요합니다. 성경 속 스데반의 순교가 보여주는 절정은 ‘예수 닮음’이었습니다. 매 순간 내 삶이 예수님과 얼마나 닮아있는지 끊임없이 점검하며 몸부림쳐야 합니다.”

순교 신앙을 몸소 체험하며 일상을 살아가기는 쉽지 않다. 정 이사장은 “전남 영광은 물론 전북 정읍 두암교회 순교기념탑, 순교자 400여명의 숨결을 확인할 수 있는 경기도 용인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등 각 지역에 마련된 순교자 기념 공간을 살펴보고 영적 유산을 마음에 새기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영광=글·사진 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