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9장을 보면 야곱은 숨이 다하기 전 그의 아들들을 불러 모아 예언 같은 유언과 축복을 남긴다. 특별히 요셉을 향한 축복은 요셉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창세기 후반부의 맥락에서도 중요하다. 야곱은 요셉을 ‘무성한 가지’라고 부르며 축복하기 시작한다.
‘무성하다’는 말은 요셉의 둘째 아들인 ‘에브라임’의 뜻이기도 하다. 요셉은 장자를 얻었을 때 그를 ‘므낫세’라고 이름 지은 뒤 “이제서야 인생의 모든 아픔을 잊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훗날 둘째를 얻었을 때는 고난의 땅에서 풍성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에브라임’이라 불렀다. 요셉은 이해할 수 없었던 고난의 시간과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을 넘어 고난 가운데 풍성한 열매를 자라게 하신 하나님을 발견했다.
요셉이라는 나무가 고난의 시간 가운데서도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이유는 샘 곁에 심겨 있었기 때문이다. 샘은 모든 생명의 원천이다.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물은 온 땅을 생명력으로 가득 채운다. 야곱은 그 샘 곁에 심긴 요셉의 가지들이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담장을 넘어 뻗어나갈 것이라 말한다. 식물은 수동적 존재인 것 같지만 식물이 가진 생명에는 굉장한 힘이 있다.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오는 잡초를 보라. 생명력은 모든 난관과 장벽을 뚫고 경계를 확장해 뻗어 나가게 만든다.
우리에게 이 생명의 원천은 어디에 있는가. 예수님은 야곱의 샘에 물을 길어 왔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를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물은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성령의 생명을 가리킨다. 예수님 안에 뿌리박힌 자는 누구나 이 생명력으로 충만한 가지가 된다는 것이 성경의 약속이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들은 생명을 얻고 또한 풍성한 복을 누리며 열매 맺는다.
오늘날 성도와 교회가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복과 풍성함에 대해 말하기란 조심스럽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성장에 대한 큰 오해가 있기 때문이다. 무성한 가지는 분명 하나님이 복 주신 결과다. 그 복은 하나님께서 태초로부터 주시고자 하신 생육과 번성의 복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복이 자기 충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 복과 생명력이 흘러나가 온 창조 세계에 넘쳐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하시면서 성령을 부어주신다. 다시 말해 성령은 결코 우리만 즐겁고 행복하게 살라고 주신 게 아니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인 성령은 우리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주시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이라는 넘치는 생명수를 머금고 자라가는 가지다. 우리에게 성령을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이유는 그 생명의 성령을 힘입어 자라고 뻗어나가고 열매 맺어서 곤고한 영혼들의 쉼터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평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놀라운 죄 사함의 은총을 경험하지 못하는 자들을 향해 뻗어가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가진 자는 자기 스스로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생명은 자기 자신을 지탱하는 힘을 넘어 온 세상을 향한 복이 된다. 그러므로 샘 곁에 심긴 나무의 가지들은 세상을 향해 뻗어 나간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생명의 전달자가 되기 위해 담장 너머로 뻗어간다.
송태근 삼일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