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웅빈 특파원의 여기는 워싱턴] 주 104시간 일해야 임대료 감당… 美 근로자 ‘팍팍한 월세살이’

입력 2023-06-21 04:06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지난 7일(현지시간) 자전거를 탄 남성이 ‘세 놓습니다(For Rent)’고 쓰인 표지판 앞을 지나고 있다. 지난달 미국의 평균 월 임대료 호가는 지난해 같은 달보다 4.8% 상승한 2048달러(약 262만원)를 기록했다. 미국의 임대료 상승률은 지난해 2월 전년 동기 대비 17%로 최고치를 기록한 이후 다소 둔화하고 있지만 대부분 세입자에게는 여전히 부담스러운 수준이다. EPA연합뉴스

뉴욕주에서 원 베드룸에 살려면
최저임금 두 배 수준 벌어야 가능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월세 급등
인플레이션 끌어올리는 주범 꼽혀

지난 20년간 싼 주택공급 태부족
새 아파트는 대부분 고급 ‘A클래스’
퇴거 임차인 늘며 노숙자도 증가
경제난, 바이든 재선가도에 발목

미국에서 정규직 근로자가 적정 수준의 임대료를 감당하려면 시간당 23달러(약 2만9000원) 이상을 벌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 주택 당국은 적정 임대료를 월 소득의 30% 미만으로 권장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 저소득주택연합(NLIHC)이 전국 월세 평균을 기준으로 계산했더니 원 베드룸은 23.67달러, 투 베드룸은 28.58달러를 시간당 임금으로 벌어야 이 기준을 충족한다.

뉴욕주의 경우 침실 1개짜리 아파트를 감당하려면 근로자는 현재 최저임금(시간당 15.74달러)의 두 배 수준인 시간당 30.33달러를 벌어야 한다. 최저임금 근로자가 침실 2개짜리 집을 감당하려면 주당 104시간을 일해야 적정 수준 임대료 수준을 맞출 수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미국의 살인적인 월세 수준을 보여주는 지표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월세가 급등하면서 적정 수준 임대료 부담 기준은 이미 대부분 근로자에게 다른 세상 이야기가 되고 있다. 19일(현지시간) NLIHC에 따르면 평균 임금을 받는 미국 노동자가 미국 평균 임대료인 월 2040달러를 지급하기 위해서는 주당 63시간을 일해야 적정 수준 부담을 지게 된다. 이는 지난해 평균보다 3시간, 코로나19 팬데믹 이전보다 6시간 늘어난 것이다.

부동산 정보업체 질로우가 미국 227개 도시의 월별 소득 대비 임대료 비율을 분석한 결과 지난 4월 약 67%가 권장 기준을 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지난 3월 65%에서 더 증가한 수치다. 임대료 가격 상승이 소득 증가분을 앞서고 있다는 의미다.

227개 도시 중 9곳은 중간 소득 세입자가 소득의 절반 이상을 월세로 지급하는 심각한 임대료 부담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뉴저지주 트레튼(74.12%), 코네티컷 브리지포트(72.10%), 플로리다주 마이애미(69.59%), 캘리포니아주 산타마리아(60.11%), 뉴욕시(58.87%) 등이 중위 소득 가구의 임대료 부담이 가장 높았다.

질로우의 제프 터커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올해 임대료 시장은 식고 있지만 여전히 가격은 천천히 상승하고 있어 임차인에게 실질적인 안도감은 없다”며 “미국 대부분 도시의 임대료는 전혀 저렴하지 않다”고 말했다.

현재 높은 임대료는 미국 인플레이션 데이터를 끌어올리는 주범이다. 미 노동통계국이 최근 발표한 5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 상승하며 내림세를 보였지만 주거비용은 1년 전보다 8% 이상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전월 대비로도 0.6% 상승해 월별 물가상승률의 가장 큰 요인이 됐다.

저렴한 주택 공급도 부족하다. 미 온라인매체 악시오스는 “지난 20년 동안 건설된 대부분의 신규 아파트는 고급 편의시설을 갖춘 메인가의 ‘A 클래스’ 시설”이라며 “올해도 신축 아파트 공급이 대규모로 이뤄지지만 이 중 70~80%가 임대료가 비싼 A 클래스”라고 설명했다. 데이터업체 코스타의 제이 비릭은 “판매할 수 있는 유일한 신차가 벤츠나 캐딜락, BMW라는 의미”라며 “현재 임대 주택 시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비영리 주거 기업인 엔터프라이즈 커뮤니티 파트너스의 플로라 아라보 이사는 “집세는 실제로는 내려가지 않는다. 팬데믹 시대 주거 지원이 사라지고 가격은 계속 상승하면서 미국은 임대 위기에 빠져들고 있다”고 말했다.

악시오스도 “지난 2년 동안 임대료가 급등하면서 높은 인플레이션이 유지되고 있으며 많은 미국인의 삶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며 “임대료 상승률이 전국적으로 둔화하고 일부 지역에서는 하락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중산층 또는 저소득 임차인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주거 비용 상승으로 퇴거 조처된 임차인이 늘면서 노숙자까지 증가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도심과 주 전역에 있는 150개 기관의 노숙자 집계치를 받아 분석한 결과 100곳 이상이 올해 노숙자 증가를 보고했다고 보도했다. 시카고와 마이애미, 보스턴, 피닉스 등 주요 도심 지역 증가세가 두드러졌다.

WSJ이 지난해 가장 노숙자가 많았던 100개 지역 중 67곳의 자료를 받아 검토한 결과 48곳에서 지난해 대비 9%, 2020년 대비 13% 증가했다. 이는 이민자 증가와 주거비 상승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WSJ은 “이런 추세가 이어지면 미국 사회는 최근 수년간 보지 못했던 수준의 급격한 노숙자 증가를 마주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인플레이션 문제는 조 바이든 대통령의 재선 도전도 발목을 잡고 있다. 로이터통신과 입소스 공동 여론조사에서 응답자들은 미국이 현재 직면한 가장 큰 문제로 경제(22%)를 가장 많이 꼽았다. 바이든 대통령이 가장 우선순위에 둬야 하는 분야 역시 경제(52%)라고 지적했다. 바이든 대통령의 국정 수행 지지율은 41%였는데, 경제 분야는 25%로 낙제점 수준이었다. 이 분야에 대한 불만은 64%까지 치솟았다.

민주당 성향의 싱크탱크인 서드웨이 짐 케슬러 부소장은 “인플레이션이 낮은 지지율의 원인”이라며 “인플레이션이 하락하더라도 최근 몇 년간의 물가 상승과 경제적 불확실성으로 지속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웅빈 워싱턴 특파원 im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