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값 내려야” 추경호 압박에… “검토는 하지만…” 업계 고심

입력 2023-06-20 04:08
19일 오후 서울 시내 대형마트에서 직원이 라면 제품을 정리하고 있다. 연합뉴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라면값 인하’ 발언이 식품업계를 흔들고 있다. 라면업계는 19일 “물가 고통분담 차원에서 다각도로 검토하겠다”는 원론적인 공식 입장을 내놨다. 하지만 속내는 추 부총리의 발언에 압박감을 느끼며 당혹스러워하는 분위기다. ‘국제 밀 가격 하락’ 외에는 가격 인하 요인이 없고, 원재료인 밀가루는 여전히 인상된 가격에 거래되기 때문이다.

식품업계가 느닷없이 라면 가격 인하를 검토하게 된 배경에는 전날 KBS 일요진단에 출연한 추 부총리의 발언이 있다. 추 부총리는 “지난해 9~10월 (기업들이 라면 가격을) 많이 인상했는데, 현재 국제 밀 가격이 그때보다 50% 정도 내렸다. 기업들이 밀 가격의 내린 부분에 맞춰 적정하게 내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추 부총리의 발언은 당장 압박으로 다가왔다. 일단 국제 밀 가격이 지난해보다 크게 떨어진 건 사실이다. 지난해 국제 밀 가격은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기후위기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영향까지 받으면서다.


그러다 전쟁이 길어지고 불확실성이 감소하면서 국제 밀 가격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 미국 시카고상품선물거래소(CME)에 따르면 지난해 5월 t당 419.22달러까지 치솟은 국제 소맥(밀) 가격은 지난 16일 기준 252.8달러(39.7%)까지 떨어졌다. 추 부총리 발언의 핵심은 ‘밀 가격이 내린 만큼 라면 가격도 내릴 수 있는 것 아니냐’로 풀이된다. 하지만 식품업계는 이 같은 해석에 난색을 표한다. 밀 가격은 내렸으나 라면의 원재료인 밀가루 가격은 내리지 않았다.

밀가루 가격부터 내리면 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올 만하다. 하지만 제분업계는 최근 국제 밀 가격이 떨어졌다 해도 평년 대비 여전히 높은 수준이고, 밀가루로 가공하는 데 필요한 제반비용 부담이 크기 때문에 당장 가격 인하는 쉽지 않다는 입장이다. 실제로 국제 밀 가격은 2018년 t당 182.08달러, 2019년 182.08달러, 2020년 202.35달러였던 때와 비교하면 여전히 비싸게 형성돼 있다.

라면업계가 선뜻 가격 인하를 고려하지 못하는 이유는 또 있다. 일부 원·부자재 가격은 오히려 올랐고, 전기요금과 가스요금 인상 등으로 운영비 부담 또한 커졌다. 식품기업들은 원재료를 대부분 수입하는데 고환율 기조가 이어지는 것도 여전히 원가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식품업계 관계자는 “원재료 가격 변동의 불확실성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가격 인하를 섣불리 했다가는 수익성 악화가 우려된다”고 말했다.


라면업계는 이명박정부 시절이던 2010년 가격을 인하한 뒤 지금까지 한 번도 가격을 내린 적이 없다. 13년 만에 다시 등장한 ‘라면값 인하’ 발언은 주식시장에 악영향을 줬다. 이날 유가증권시장에서 라면주가 일제히 약세를 보였다. 농심은 전장 대비 6.05% 하락한 41만1500원에 거래됐다. 삼양식품 주가는 7.79% 내린 10만5400원, 오뚜기는 2.94% 내린 42만8500원에 마감했다.

고물가 부담을 1년 넘게 받고 있는 소비자들은 라면값이 조금이라도 내린다면 환영한다는 분위기다. 이날 서울 송파구의 한 대형마트에서 만난 주부 김모(55)씨는 “라면값 내린다고 살림이 달라지는 건 아니겠지만 한 푼이라도 아낄 수 있다면 그거 마다할 사람이 있겠느냐”며 “워낙 물가가 올라서 뭐든 해주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문수정 기자 thursda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