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뜨락에서] 접목, 그 강한 힘으로

입력 2023-06-20 03:03

“병원비를 환불해 드릴 테니 잠시만 기다리세요.” “네?” 수납원은 다시 한번 말했다. “어제 MRI 찍으셨던 비용 환불해 드립니다.” 퇴원 수속을 하러 왔는데 병원비를 환불해 준다고 한다.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그녀의 굳은 시선에서 불행한 무게가 다가왔다.

“따님의 병명이 3대 소아암에 포함돼 MRI비가 보험에 적용됩니다.” 의사의 진단서와 소견서를 받는 순간부터 인정할 수 없어 외면하고 있었다. 두려움과 공포가 내 심장을 옥죄어 간신히 버텼는데 그 힘까지 빼앗아야 했는지 또다시 확인시켜 줬다. ‘오진은 없어. 너의 딸은 암이야.’

MRI비가 없어서 언니에게 손을 내밀었었다. 인생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가난이 절망스럽고 비참해서 속울음으로 겨워냈는데 딸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속삭이는 돈이 돼 다시 나에게 왔다. 무섭고 잔인했다. 가슴 푸들거려오는 아픈 떨림 속에서 육체를 타고 쏟아져 내리는 눈물. ‘찢어져서 소멸해 버려! 우리 인생에서 꺼지란 말이야’ 울부짖었다.

나는 언제부터 이 의자에 앉아 암흑 속을 걷고 있었던 걸까. 시뻘게진 눈을 감추기 위해 병실을 나갔던 남편이 어느새 왔는지 내 등을 쓰다듬으며 울고 있었다. 사위어가는 햇살아래 감당할 수 없었던 돈은 남편 손에서 강한 힘을 받고 있었다.

우리는 딸의 눈을 보며 말을 해야 했다. 희망과 불안이 뒤섞여 있을 딸에게 수천 가지의 형체가 있고 길도 많아 헤매야 한다는 사랑이 아닌 오직 하나의 사랑, 전능자의 사랑만 붙잡아야 한다고. 우리 앞에 닥칠 미래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고통의 시간이 되더라도 믿음을 지키며 붙잡은 손을 절대 놓치지 말자고.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를 말하며 고백해야 했다. 딸의 뼈암 진단을 받고 보니 고난이라 불평했던 지난 삶이 흩날리는 먼지보다 작게 느껴졌다. 몸과 마음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마음이 외치고 또 외쳤다.

6월의 하늘아래 밤꽃이 폭죽을 이룬다. 본래의 야성을 드러내던 겨울 산은 온데간데없고 봄의 연둣빛도 시나브로 사라지더니 초록의 무성한 숲이 되었다. 고속도로 위 여름햇살이 화살처럼 내리꽂히며 바람과 빛을 이룬 풍경 속에 달리고 있는 시간이다. 방금 전까지 열정적으로 노래 부르던 딸들은 에너지가 다 소진돼 버렸는지 순식간에 잠이 들었다.

흐트러진 모습으로 곤하게 자고 있는 딸들의 모습을 보니 조금 엉뚱한 생각을 한다. 만약 행복하고 소중한 모습을 순간마다 저장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면 어떤 모습을 담을 것인가! 10여년 전에 딸의 생명이 허물어져 버릴까 봐 나를 보던 그 눈빛이 사라질까 봐 며칠을 죽음 앞에 떨어서인지 의외로 소소하다.

기도하는 뒷모습, 흐트러진 운동화, 서로를 향한 미소, 먹다 남은 비스킷? 문득 모든 게 감사해서 저장할 것만 같다. 새삼스레 가족과 함께 걸어가야 할 길이 남아 있고 만나야 할 시간이 펼쳐져 있음이 감사하다. 차창으로 스며든 속삭이는 바람이 마음을 간지럽힌다. 한 폭의 그림이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걸렸다.

작년 이맘때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을 그리는 최승주 화백의 개인 전시회를 갔었다. 가시관에 찢겨 선홍색 피를 흘리는 예수님의 성화들 중에서 유독 눈시울이 붉게 물든 예수님이 있었다. 그렁그렁하게 고여 있는 눈물이 금방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예수님의 두 눈.

나를 대신해 울고 계시는 것 같아 “예수님 제가 마음이 아파요. 아픈 딸의 몸을 고쳐주세요” 하며 기도했었다. 붉게 물든 눈이 더 붉은 예수님 두 눈과 마주칠 때 ‘찰칵’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커다란 화폭의 예수님 얼굴 앞에서 카메라를 들고 활짝 웃고 있는 딸이 보였다. 그 순간 나는 하늘 향해 닿는 뿌리 깊은 나무를 보았다. 예수님과 아픈 우리 딸은 접목돼 있었다.

좋은 나무에 좋은 가지만 접목하는 세상의 방법을 벗어나 뿌리 깊은 나무에 병들고 상처 입은 가지를 접목하신 예수님. 딸을 향해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시며 아픈 모습 그대로 열매를 맺어가고 계셨다. 오늘처럼 대학병원에서 정기검진을 받고 끝나지 않을 희소병 앞에 두려워도 시끄럽게 노래하며 즐겁게 웃을 수 있는 힘이 됐다. 철이른 낙엽 하나가 슬며시 곁에 내려 말없이 곁에 있어 준 것이 고맙다고 했던가! 나도 그냥 고맙다.

장진희 사모(그이름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