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예수, 바울에게 나타나시다

입력 2023-06-20 03:06

사울은 ‘주의 제자들’(1절), ‘그 도를 따르는 사람들’(2절), ‘주의 성도’(13절),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14절)을 남녀 막론하고 붙잡아 가두는 데 몰두해 있었습니다. 사울의 회심사건을 주후 32~35년으로 보는데 사울이 2~5년간 이 박해에 몰두했음을 의미합니다.

사울의 회심사건 시작은 하늘에서 빛이 사울을 둘러싸고 그가 땅에 엎어지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가 박해했던 예수와의 조우입니다. 엎어진 상태에서 일어나 눈을 떴지만, 아무것도 볼 수 없었고 일행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갔습니다. 사울은 사흘 동안 보지 못한 상태로 식음을 전폐했습니다.

이후 장면이 바뀌어 다메섹에 사는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등장합니다. 환상 가운데 나타나 할 일을 지시하시는 예수님과 아나니아의 대화가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그의 쓰임을 말씀하십니다.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15~16절) 아나니아는 말씀에 순종해 사울을 만나 그에게 손을 얹고 그를 형제로 환대한 후 자신이 본 환상을 알립니다.(17절)

그 즉시 사울에게 변화가 생깁니다.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고, 다시 보게 됩니다. 일어나서 세례를 받습니다. 다시 음식을 먹고 며칠을 제자들과 지내다가 전도자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그가 회당에서 전한 내용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20절)였습니다. 처음 다메섹의 회당으로 향했던 목적이 바뀐 것입니다. 이렇게 그의 회심사건은 마무리되고,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됩니다. 그 길은 하나님이 아나니아에게 보이신 환상대로 고난의 길입니다.

다메섹 도상의 체험은 바울의 ‘부활하신 그리스도 체험’일까요. ‘바울 자신의 부활경험’일까요.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현은 단순히 ‘눈’에 보인 현상이 아닙니다. 육신의 눈이 목격하는 객관적 사건이었다면 어찌 그들만이 그 부활을 보았다고 말하겠습니까.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를 경험한 것은 그들의 가슴이 뜨거워졌을 때였습니다.(눅 24:32) 그렇다면 부활 후 현현, 나타나심, 보이심, 드러나심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부활을 체험한 그들의 삶을 통해 드러나신, 나타나신, 보이신 예수가 아니겠습니까. 부활의 현현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의 ‘삶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누가는 바울회심 사건을 기록하면서 예수님의 생애를 오버랩시키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빛이 그를 둘러싸고 소리가 들린 것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세례의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바울이 3일간 암흑 속에서 식음을 전폐한 장면은 예수님의 죽음과 무덤 속 시간을 의미합니다. 이 기간에 바울이 지금까지 살아온 의미와 하나님과 자신에 대한 상들이 무너집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신앙의 대상이 됐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부활, 나의 부활은 없습니다. 모든 고난과 십자가의 책임도 예수님께 떠넘겼습니다. 나의 십자가, 나의 고난은 예수님 십자가 그늘에 숨겨버렸습니다. 바울은 그 자신의 ‘나의 부활’을 이루었습니다. 그는 당당히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a) 그를 ‘위협과 살기로 숨쉬게’ 했던 모든 완벽주의, 율법주의, 강박, 두려움들은 비늘처럼 떨어져 나갔고 그는 부활했습니다. 이제 내가 부활할 차례입니다.

김경희 부목사(목포산돌교회)

◇목포산돌교회는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교회로 세상과 역사 속에서 시대적 사명을 다하는 교회를 지향하며, 올해는 ‘녹색교회’로 선정되어 기후위기 시대에 창조신앙과 생태영성을 회복하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