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재정부, 산업통상자원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3개 부처가 각기 다른 기술 육성법을 만든 데는 산업을 총괄하는 컨트롤타워가 없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미국이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반도체지원법(CHIPS Act)을 시행하면서 한국 정부도 정부 차원의 산업보호정책을 법을 통해 지원하자는 취지지만 국내 산업 육성보다 해외발 변수에 대응하는 성격이 커 중구난방으로 법안과 정책이 만들어지고 있는 모양새다.
문제는 각 부처가 지정한 전략기술이 거의 비슷하다는 것이다. 산업부는 반도체, 디스플레이, 이차전지, 바이오를 첨단전략산업으로 지정했고 과기부는 국가전략기술로 반도체, 디스플레이, 이차전지, 모빌리티 등 12개 분야를 정했다. 조세특례제한법은 반도체, 이차전지, 백신, 디스플레이, 수소, 미래형 이동수단 등이 국가전략기술에 해당한다고 정하고 있다.
기술 육성 정책도 중복된다. 과기부는 원천기술, 기초 분야에 있어서 과학기술을 지원하고, 산업부는 그 기술을 실용화해 상업적으로 활용하는 산업을 육성하고 있다. 필연적으로 두 분야가 겹치는 ‘그레이존’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산업부는 앞서 과기부 소관의 국가전략기술육성에 관한 특별법 심사 당시 “국가첨단전략산업법과 유사하거나 중복돼 제명 변경 및 명확한 차별성을 확보해야 할 필요가 있다”며 “유사입법 제정은 두 법 모두의 입법 효과를 저해한다”는 입장을 내기도 했다.
이런 공무원의 일방주의적 기준과 지원방식에 기업들은 혼란스럽다는 반응이다. 정부 관계자는 18일 “산업부, 기재부, 과기부가 법령에 따라 다 다른 전략기술을 분류하고 있는데, 법령을 들여다봐야 하는 입장에서는 혼란스럽다”며 “세제 지원이 되는 기술이냐고 궁금해하는 기업 문의도 많이 오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낭비를 막기 위한 정부 부처 간 협력 필요성은 이전부터 제기돼 왔다. 2012년에는 융합행정, 2014년에는 협업행정 등 각 정부에서 행정개혁을 추진했으나 ‘칸막이 행정’ 지적은 계속되고 있다.
실패 원인으로는 협업 유인 부재가 지목된다. 다른 부처의 협업 자체도 번거로운데 협업으로 탄생한 결과를 다른 부처와 나눠야 하기 때문이다.
한 국책연구기관 관계자는 “미국이 IRA법, 칩스법을 발표하자 한국 정부가 다급하게 대응하는 과정에서 정책이나 법이 중구난방으로 만들어지는 것으로 보인다”며 “현안이 있을 때마다 각 부처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기는 하지만 정책적 큰 그림은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종영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선진국의 정책과 법령에 하나하나 따라가기보다는 우리의 경제 안보 목표에 다가가는 법령으로 중심을 잡을 필요가 있다”며 “단순히 반도체, 배터리 등 국가 간 무한경쟁에 일일이 대응하는 것보다는 우리 첨단전략산업의 전략적 지향점을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법·제도의 운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세종=심희정 권민지 기자 simcit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