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선생님은 연세대 원주캠퍼스(미래캠퍼스) 자연과학계열로 지원을 권유했다. 당시엔 질적인 부족함을 가진 게 ‘분교’라는 사회적 인식이 있었기에 유명 대학 지방 캠퍼스의 경쟁률은 높지 않았고 마음만 먹으면 장학금까지 받고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대중교통의 발달이 촘촘하게 이뤄진 시대가 아니었기에 통학은 꿈도 못 꿨고 자취나 하숙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마음이 썩 내키지 않았기 때문에 서울이나 수도권 대학을 찾기 위해 다시 노력했다. 전기대 후기대 전문대 재수의 순서로 이어지는 게 일반적인 시스템이라, 첫 지원이 가장 중요했는데 ‘못 먹어도 고’라는 어처구니없는 발상으로 최고의 공대, 최고의 경쟁률을 자랑하는 학과에 무모하면서도 무리한 도전을 택했다. 아마도 미달이나 커트라인 턱걸이, 운으로 붙을 수 있다는 착각에 빠졌던 것 같다. 나는 담임선생님과 학우들의 만류에도 직진했다. 역시 결과는 1차 지원 낙방.
그때 생각을 해보니 어릴 적부터 오랜 시간을 준비했던 미술학도, 그림쟁이로의 목표를 온 가족의 반대로 포기하고 딱딱한 공과대학의 엔지니어를 목표로 잡았기에 잠시나마 정신이 나갔거나 정신을 놓았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여하튼 아쉬움을 뒤로 남긴 채 나는 다시 정신을 바짝 차리고 후기대 제2지망에 집중했다. 워낙 하향 지원이라 당락엔 부담도 없었다. 원서를 접수하고 기다리다가 그 당시엔 최신 시스템인 ARS로 합격을 미리 확인하는 방법이 있었기에 조금은 떨리는 마음으로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걸었다.
“수험번호 ○○○ 조병석씨, S대학 산업공학과 합격자 명단에 없습니다”라는 ARS 여성 안내원의 멘트. 순간 앞이 캄캄해지고 하늘이 노랗게 변했다. 99% 합격일 거라 당연히 생각했었다. 여기도 못가고 제3지망인 전문대를 가는 건 상상도 못 했기에 더 숨이 막혔다. 그렇다고 재수를 한다는 건, 가정 형편상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잠을 뒤척이며 늦은 새벽 시간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그런데 마치 미래를 ‘선몽’하듯 특별한 꿈을 꾸게 됐다. ARS 안내원이 등장해 꽃을 들고 집까지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장면. 그리고 고등학교에 등교하던 중 같은 반 친구가 자신이 밟은 똥을 나의 어깨에 닦는 더러운 꿈이었다.
버스와 전철 그리고 다시 버스를 타고 수원의 S대학까지 가야 하는 먼 일정이었지만, 왠지 꿈의 내용이 자꾸자꾸 맴돌았고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기에 길을 나서서 수원까지 내려갔다. 도착 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살 떨리던 그 순간. 수험표의 번호 순서대로 나열된 게 아니라 합격자들의 성적에 따라 고득점자로부터 점수별로 적혀있는 명단이었다. 위부터 찬찬히 훑어보았다. 이윽고 상단 쪽에서 눈에 쏙 들어오는 낯익은 이름 하나가 보였다. ‘조병석’. 마치 영화나 드라마의 반전처럼 그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과 그의 해몽 이야기. 성경에 꿈을 통해 역사가 이뤄지는 아름다운 기록들이 많이 있듯, 여러 목소리가 조화를 이루는 ‘하모니 뮤지션’으로의 첫걸음이 됐던 S대 음악 동아리 ‘도레샘’과의 끈을 이어주기 위해 꿈으로 미리 인도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정리=최경식 기자 ks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