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윤의 MZ 관찰기] MZ세대는 ‘디지털 유목민’… 정박 대신 이주하며 살아간다

입력 2023-06-19 04:05

무한히 펼쳐진 온라인 공간 이동
끊임없이 공동체 개척·변화 모색
자유분방·개방적인 사고로 무장
벤처사업 등 새로운 분야 삶 추구

디지털 문화가 변화무쌍하다면
중심 잡는 아날로그 구심력 필요
기성세대 가치·세계관 공감 중요

“MZ는 정박하지 않고 이주하며 살아간다.” MZ세대 관찰기의 네 번째 테제다. 기성세대가 한정된 지리적 공간에 터를 닦고 정박하고 살았다면 MZ세대는 무한한 온라인 공간에 끊임없이 공동체들을 개척하고 이주하며 살아간다. 아날로그 인류의 삶이 정박이었다면 디지털 신인류의 삶은 이주다. 지금은 신인류에게 새로운 이주의 시대이며 개척의 시대다.

디지털 유목민으로서의 정체성

2000년대 초반 한 이동통신사 광고 카피가 크게 유행한 적이 있었다. “내가 니꺼야? 난 누구한테도 갈 수 있어.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기성세대 연애 도덕관을 일순간 당황하게 만든 환승연애 에피소드 내용이었다. 과장 좀 보태면 디지털 신세대들이 기존 사고체계와 가치관을 허물고 자유분방하고 개방적인 사고, 변화와 이동성을 특징으로 인류로 진화할 징후로 읽혔다. 실제로 모바일 미디어가 가져온 사회적 이동성의 증가와 모바일 사회로의 이행은 당시 핵심 화두 중 하나였다.

그 후 20여년이 흘렀다. 그동안 많은 MZ세대 졸업생이 배출됐다. 가끔 학교로 찾아오는 졸업생들을 만나곤 했는데, 상당수가 안정적이고 번듯한 직장을 관두고 벤처사업이나 전혀 새로운 분야의 삶을 모색 중인 걸 발견하고 놀라곤 했다. 기성세대에게 직장은 입사해 정년퇴직할 때까지 다니는 평생 일터 개념이었지만 이동에 익숙한 MZ세대에게 직장은 언제든 옮길 수 있는 임시 경유지 정도에 그치는 걸까, 계속 고민하게 됐다.

게티이미지뱅크

흔히 자유롭게 이동하며 근무하는 프리랜서 직업군을 디지털 유목민(digital nomad)으로 지칭하고 한다. 나는 이제 디지털 유목민이 특정 직업군을 가리키는 것을 넘어서 디지털 세대 전반의 정체성으로 확장됐다고 생각한다. 두 개 이상의 직업을 가진 투잡족 증가가 반드시 생계 문제 때문만은 아니며, 이른바 ‘부캐’ 문화의 확산 역시 단순한 놀이로만 치부할 수 없다. 디지털 개척시대의 주역인 MZ세대가 디지털 유목민의 정체성을 기본 장착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온라인 은하수 여행하는 히치하이커

영국 작가 더글러스 애덤스의 소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지구 파괴 당시 우주선에 히치하이크해 극적 탈출한 지구 유일 생존자의 우주 유랑 이야기를 블랙 유머로 풀어나간다. 나는 디지털 인류 MZ가 오프라인 지구의 삶을 탈출하기 위해 온라인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와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디지털 인류는 다양한 온라인 공간에서의 삶을 물색하고 탐색하며 살아간다. 신인류 이주의 동인은 디지털 사회가 되면서 삶의 공간 자체, 나아가 공간의 개념 자체가 변모했기 때문이다. 집, 일터, 학교와 같은 한정된 공간에서만 살았던 아날로그 인류와 달리 디지털 인류는 다양한 온라인 공간을 넘나들고 이동하면서 살아야 한다. 아날로그 인류에게 공간이 머묾의 장소라면 디지털 인류에게 공간은 흐름의 장소이다.

디지털 인류의 인터넷 개척 시대

나는 훗날 역사가들이 21세기 인류 역사를 호모 사피엔스로부터 독립하려는 디지털 태생 인류의 인터넷 개척시대(The Wide Web)로 명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17세기 유럽에서 북미 신대륙으로 이주한 이주민들이 200여년간 전쟁, 개척, 정착의 과정을 거치면서 서부개척시대(The Wild West)로 불렀듯이 말이다. 디지털 인류도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공간인 광대역 온라인 공동체를 개척하며 새로운 삶의 방식을 모색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MZ는 디지털 인류의 독립을 준비하는 디지털 개척민(digital pioneer)에 가깝다.

모든 개척시대가 그렇듯이 이 과정은 본질적으로 구체제와 신체제 간 충돌이며 새로운 균형 형성의 역사다. 과거 개척시대가 침략, 전쟁, 독립, 내전, 학살, 강제이주와 같은 인간 잔혹사도 포함한 반면 디지털 인류의 개척시대는 그렇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개척 과정에서 물리적 공간의 점유가 아닌 온라인 공동체 구축이 중심 활동이 되고 있으며, 충돌의 핵심도 아날로그 문화와 디지털 문화 간 생활양식의 충돌이기 때문이다.

구심력 아날로그와 원심력 디지털 문화

21세기는 아날로그 문화와 디지털 문화의 충돌, 호모 사피엔스 문화와 포스트 호모 사피엔스 문화의 충돌로 새로운 인간 삶의 방식이 만들어지는 시기다. 나는 현 시기 아날로그 문화를 구심력으로, 디지털 문화를 원심력으로 파악한다. 원심력인 디지털 문화는 끊임없이 운동하며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다. 20년 전 인간의 삶과 현재 인간의 삶을 비교해 보자.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가 딱 적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동안 변화의 폭과 깊이는 늘 상상의 한계를 넘어왔다. 상상 초월 변화는 지금도 진행 중이며, 한 치 앞 미래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다. 최근에는 단연코 챗지피티(ChatGPT) 같은 생성형 인공지능(AI)이 화두다.

디지털 기술 발전이 추동하는 운동의 크기와 방향이 변화무쌍하다면 운동의 중심을 잡아주는 구심력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아날로그 문화다. 예를 들어 AI 알고리즘은 의사결정의 효율성과 이용자 경험의 혁신을 가져다줄 수 있지만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강화하거나 분열과 양극화를 조장할 위험성도 보여주고 있다. 결국 AI 기술의 사회적 통제 문제는 아날로그 시대 기술 통제를 위해 마련한 법과 규범과 윤리에서 지혜를 구할 수밖에 없다.

레트로 문화가 유행하는 이유

나는 현시대에 레트로 문화가 유행하는 것은 단순히 유행이 돌고 돌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디지털 문화의 예측 불가능한 운동성과 이동성은 구심점이 필요하고, 아날로그 문화가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성세대와 MZ세대 간 소통과 공감이 더욱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MZ세대는 기성세대의 낡은 가치를 넘어서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려는 욕망을 지니고 있지만 아직 기존 현실 세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절망 역시 동시에 지닌 세대다. 궁극적으로 MZ세대가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기성세대의 가치와 세계관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하고, 레트로 문화 속에 그 해답이 숨어 있을 수 있다.

홍종윤 서울대 BK교수·언론정보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