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스틱과 헤어질 결심

입력 2023-06-17 04:02

지구 환경에 가장 심각한 위협으로 자리 잡은 ‘플라스틱 오염’에 맞서기 위한 국제적 합의가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해 열린 유엔환경총회(UNEA)에서 내년까지 법적 구속력 있는 플라스틱 국제협약을 마련하기로 의견을 모은 데 이어 최근에는 늦어도 올해 11월 협약 초안이 나와야 한다는 정부 간 추가 합의까지 이뤄졌다. 170여개 유엔 회원국이 참여하는 이번 협약은 해양 플라스틱 오염을 넘어 플라스틱의 전주기(full life cycle) 관리를 핵심으로 하는 최초의 국제협약이다. 전 지구적인 플라스틱 문제 해결의 전환점이 됐다는 점에서 2015년 파리협정 이후 가장 중대한 국제환경조약이 될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협약을 최종 조율하는 마지막 협상 회의는 내년 하반기 한국에서 열린다.

플라스틱 공동대응… 역사적 합의

“플라스틱 오염은 이제 ‘전염병’이 됐습니다. 오늘 결의로 우리는 공식적인 치료의 궤도에 올랐습니다.”

지난해 3월 2일 케냐 나이로비에서 열린 제5차 UNEA에서 플라스틱 국제협약 결의안이 통과되자 참석자들의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각국 대표단이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결의안의 정식 명칭은 ‘플라스틱 오염을 끝내기 위한 법적 구속력 있는 국제협약’이다. UNEA는 그동안 해양 플라스틱 오염에 관한 논의를 여러 차례 진행했지만 플라스틱의 생산부터 처리까지 모든 단계를 관리하는 구속력 있는 협약을 제정하기로 한 것은 처음이었다.

유엔은 정부 간 협상위원회를 구성하고 모두 5차례 협상회의를 통해 2024년까지 협약을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1차 협상 회의는 지난해 11월 28일부터 12월 2일까지 우루과이 푼타델에스테에서 개최됐다. 2차 협상 회의는 지난달 29일부터 지난 2일까지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열렸다. 3차는 오는 11월 케냐 나이로비에서, 4차는 내년 상반기에 캐나다에서 열린다. 한국은 첫 협상회의 당시 5차 회의 유치를 제안했고 최근 회의에서 전체 회원국의 동의를 얻어 개최가 확정됐다.

첫 협상회의가 각국의 입장과 협상절차 등을 얘기하는 자리였다면 2차 회의에선 협상 전 제출한 서면 의견서를 바탕으로 협약에 들어가야 할 주요요소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졌다. 환경부는 “특히 플라스틱 전주기, 생산-사용-처리-환경 유출 단계별 플라스틱 오염 방지를 위한 핵심의무, 규제수단, 자발적 접근, 이행수단, 이행조치 등에 대해 포괄적으로 논의했다”고 전했다.


각국 대표단은 앞으로의 회의가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3차 회의가 열리기 전 초안을 준비하는 데에도 뜻을 모았다. 잉거 안데르센 유엔환경계획(UNEP) 사무총장은 “2차 회의의 진전과 국제법적으로 구속력이 있는 문서의 초안을 준비하는 임무에 고무됐다”며 “이제는 불필요하고 문제 있는 플라스틱을 줄이도록 제품 포장과 배송을 다시 설계하고, 재사용과 재활용이 가능한 제품과 시스템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쉽지 않은 합의… 목표·이행 방식 이견

플라스틱 오염을 해결해야 한다는 공감대는 이뤄졌지만 앞으로의 협상 과정이 수월하지만은 않을 것이란 관측이 많다. 산유국과 대규모 석유산업을 보유한 국가들은 각국의 상황에 따라 플라스틱 감축 목표나 규제를 다르게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구체적인 오염 종식 목표 연도는 물론 플라스틱으로 대표되는 폴리머(동일한 구조 단위가 반복되는 큰 분자) 감축, 수출입 제한에 대해서도 국가 간 이견을 보였다.

2차 회의에선 의사 결정 방식을 두고도 치열한 논쟁이 벌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사우디아라비아, 러시아, 중국은 만장일치에 이르지 못했을 경우 3분의 2 이상 동의를 얻으면 조약이 결정되는 규정에 반대를 표했다. 회의가 열린 첫 이틀간 이견이 좁혀지지 않자 위원회는 의사 결정 방식을 추후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 이를 두고 규제 반대 국가들이 일부러 회의를 지연시키는 ‘전술’을 폈다는 분석도 나왔다.

플라스틱 오염 종식에 필요한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도 주요 쟁점이다. 미국 등 선진국들은 지구환경기금(GEF) 등 기존 기금을 활용하자는 입장이다. 개발도상국들은 새로운 메커니즘을 창설하자는 의견인 것으로 전해졌다. 협약 이행을 평가하는 방안에 대해서도 강한 구속력을 가진 이행 평가 체계를 원하는 선진국과 국가 상황을 고려해서 자발적으로 시행해야 한다고 보는 개도국의 입장 차이가 뚜렷했다.

지속가능한 플라스틱 사회를 위해


1950년대에 200만t이었던 플라스틱 누적 생산량은 2015년 38억t으로 4000배 이상 증가했다. 생산되는 양만큼 버려지는 양도 늘어 2019년 전 세계 플라스틱 폐기물 발생량은 3억5300만t을 기록했다. 이 중 재활용되는 비율은 9%에 불과하고, 관리되지 못한 채 자연에 버려지는 비율은 20%가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수백년이 지나도 썩지 않는 플라스틱이 미세플라스틱으로 남아 인간의 건강까지 위협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플라스틱 오염 문제의 심각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향후 마련될 국제 플라스틱 협약이 플라스틱의 생산·설계·폐기까지 모든 공정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거라고 보고 있다. 이번 협약은 플라스틱의 ‘지속가능성’에 초점을 맞춘 순환경제 체제를 만드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존층을 보호하기 위해 맺어진 1987년 몬트리올 의정서나 지구 온도 상승폭을 1.5도 이내로 억제하는 데 합의한 2015년 파리기후협정만큼 영향력 있는 국제 협정이 될 것이란 기대감이 크다.

전 세계 플라스틱 생산량의 4.1%를 차지하고 있는 한국 역시 플라스틱 오염 대응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나라 그린피스 플라스틱 캠페이너는 “한국 정부는 2차 회의 전 재활용과 바이오플라스틱에 치중된 사전 의견서를 제출했다”며 “한국 정부는 플라스틱 문제의 시작인 석유화학 기업의 영향력을 배제해 나가야 하며, 플라스틱 생산량 감축과 더불어 근본적 해결 방안인 재사용과 리필 기반의 해결책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종=박상은 기자 pse0212@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