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서천군 작은 마을의 부잣집 막내딸로 태어난 이순희(62·백송교회) 목사는 하나님을 몰라도 세상 부러울 것 없이 자랐다. 아버지가 세 살 때 돌아가셨지만 집안은 늘 부유했다. 거처할 곳 없는 사람들을 한두 달씩 먹여주고 재워주곤 했다. 집에서 누가 물건을 들고 나가도 모르는 척했다. 고향 마을은 교회와는 인연이 없는 곳이었다. 마을에서 딱 한 집만 교회에 다녔다. 담 하나 사이에 둔 그 집 언니 오빠 손에 이끌려 여름 성경학교에 다녔지만 먹고 노는 것뿐 예수는 전혀 믿지 않았다.
사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싫어했다. 교회 가서 스스로 죄인이라며 울고불고하는 모습이 한심해 보였기 때문이다. 멀쩡한 자기 아버지를 놔두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도 싫었다. 헌금한다는 사람들을 보고도 그럴 돈 있으면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목사는 하나님을 만난 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거듭났다.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세상의 행복은 하나님이 주신 기쁨과 비교할 수가 없었다.
언제나 계속될 것 같던 행복
“세상에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 있으면 나와봐.” 이 목사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다.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23세부터 경기도 부천에서 부업으로 피아노학원을 시작했다. 서울 종로 직장에서 퇴근한 뒤 아이들을 가르치고 밤새 피아노 연습을 했다. 학생들은 각종 대회에서 최고상을 휩쓸었다. 피아노 6대로 시작했던 학원은 30대까지 늘었다.
늘 물질적인 풍요가 함께했다. 커피 한 잔을 마셔도 드라마에 나왔던 곳을 찾아다녔고 서울 명동 거리를 지나다 마음에 드는 옷을 보면 거리낌 없이 사들였다. 어떤 때는 TV 속 연예인들보다 최신 유행 옷을 먼저 입기도 했다. 이 목사는 “당시에는 정말 내가 인생을 멋지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면서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좋아해 노래방에서 밤새 노래 부르고 유명 나이트클럽을 찾아다니며 즐겼다”고 회상했다.
이 목사는, 그의 표현을 빌리면 ‘우주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까지 만나 1986년 3월 결혼했다. 행복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 같았다.
행복 가운데 찾아온 영적 고난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아침이었다. 남편이 출근하고 이 목사도 잠깐 눈을 붙이고 출근하려는 생각으로 침대에 누웠다. 그런데 거센 바람 소리와 함께 이상한 형체가 문틈 사이로 들어와 목을 조이기 시작했다. 정신은 멀쩡한데 온몸은 꼼짝할 수가 없었다. 이 목사는 “그때부터 매일 아침 알 수 없는 세력에게 목 졸림을 당하며 사경을 헤매는 일이 반복됐다”고 말했다.
이 목사는 집터가 좋지 않아 끔찍한 일이 반복되나 싶어 친정집에 가서 지내보기도 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오히려 그 이상한 형체는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나는 너와 함께할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절망적이었다. 남편에게 정신병원에 보내 달라고 사정도 했다.
이 목사 문제는 집안의 걱정거리였다. 시름이 가득하던 시어머니는 양가에서 거의 유일한 신앙인이었던 시이모님과 상의했고, 시이모님은 영적 고난으로 힘들어하는 새 며느리를 빨리 교회에 데려가라고 권했다.
성령의 세례를 받다
이 목사와 남편은 86년 5월 여의도순복음교회 부천 성전에 첫발을 디뎠다. 단 하루라도 편하게 살다가 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절박한 순간에 교회를 찾은 것이다. 이 목사는 “조용기 목사님의 비디오 설교가 진행되는 예배 시간이었는데 성전에 들어서자마자 우레 같은 음성을 들었다”면서 “‘너는 죄인이다’라고 세 번 외치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맞아요. 저는 죄인이에요. 세상에 그 어떤 죄보다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죄였네요’라고 소리쳤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까지는 늘 베풀고 나누며 나름대로 선하게 살아온 저의 인생에 부끄러움이 없었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자마자 예수를 믿지 않은 죄가 가장 큰 죄였다고 고백하며 회개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헛되고 헛되고 헛되도다. 지금까지 네가 살아온 인생을 너는 값지고 멋지고 행복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했지만 내가 주는 기쁨과는 견줄 수 없느니라. 인생은 풀의 꽃과 같고 잠시 있다 없어질 안개와 같으니라. 네가 내일 일을 알지 못하나니 하루 동안에 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알 수 없음이라. 지금부터 내가 너에게 평안을 주노니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이 목사는 그때까지 성경을 읽어본 적이 없었다. 그는 “나중에 성경을 읽으면서 당시 하나님이 들려주신 말씀이 모두 성경에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고 소름 끼치도록 놀랐다”고 말했다. 그날 이후 3개월 동안 교회만 가면 “수도꼭지 틀어놓은 것처럼” 울었다고 한다.
세상과 신앙의 양다리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이후에도 ‘이상한 형체’는 끊임없이 이 목사를 괴롭혔다. 이 목사는 “신기한 게 예수님을 모시고 난 이후에는 악한 영들이 제 주위를 맴돌기만 했다”면서 “우리 안에 예수님을 모시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권세인지 몸으로 체험했다”고 말했다. 4년 반이나 지속되던 영적 전쟁은 어느 날 환상 가운데 빛으로 오신 주님을 만나며 완전히 끝났다.
그는 “거부하기 어려운 모습으로 다가온 악한 영들과 싸우면서 저는 영적 분별력을 얻었다”면서 “무엇보다 이해할 수 없을 만큼의 큰 사랑이 내면을 채워서 미운 사람이 없고 미워하고 싶어도 미워할 수 없는 삶을 살게 됐다”고 고백했다.
이 목사는 교회에 가자마자 성령 세례를 받고 확실한 믿음을 갖게 됐지만 세상과 구별되는 삶을 살지 못했다. 그는 “예수 믿고 10년이란 세월은 세상과 양다리 걸치며 살았다”고 말했다. 주일 예배를 드린 후 저녁에는 친구들과 어울려 노래방 등을 다니며 세상을 즐겼다. 그러면서도 가는 곳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증거했고 만나는 사람마다 교회에 나오라고 전도했다.
영적 성장 후 변화된 삶
신앙생활을 시작한 후 10년쯤 지나 이 목사는 ‘신앙생활을 잘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여의도순복음교회 부천 성전에서 늘 드리던 오후 3시 비디오 예배 외에 집 앞에 새로 생긴 개척교회 11시 예배에도 온 가족이 참석했다. 하나님은 개척교회로 옮기라는 말씀을 주셨지만 머뭇댔다.
그러던 중 송구영신 예배를 빠지고 부부동반으로 강원도 속초로 여행을 떠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남편이 운전하던 차가 급커브 빙판길에 미끄러지면서 가드레일 들이받는 사고가 발생했다. 임신 3개월이던 이 목사는 배를 감싸 안고 ‘이제 죽는구나’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차가 폐차 직전까지 간 큰 사고였지만 부부와 뱃속 아이는 전혀 다치지 않았다. 이 목사는 “사고를 당하고 다시 한번 개척교회로 옮기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음성을 들었다”면서 “집으로 돌아와 간절한 기도 속에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고 교회를 옮기는 결단을 했다”고 말했다.
개척교회에 등록하면서 이 목사는 하루 3번 40일 기도회에 참여하며 영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 목사는 “깊은 기도 속에서 완전한 변화를 경험했다. 세상과 나는 간 곳이 없고 구속해주신 예수 그리스도만 보였다”면서 “지금까지 내가 자랑했던, 중요하게 생각했던 세상의 모든 것들은 배설물과 같이 여겨졌다. 내게 중요하게 보이는 것은 오직 영혼이었다”고 말했다.
제자 양성과 세계 선교를 위한 헌신
당시 출석 교회의 담임목사가 부흥회를 인도할 때 가끔 특송을 하던 이 목사는 98년 찬양 음반을 제작한 후 본격적으로 복음 가수로 활동했다. 2000년에는 미국 애틀랜타 연합집회에서 강사로 세워져 찬양과 간증을 하다가 부흥사로 발탁됐다. 그는 “부흥 집회 현장에서 성령의 강권하시는 은혜 속에 놀라운 치료와 기적의 역사가 나타났다”면서 “이후에도 계속해서 하나님은 저를 찬양 치유 부흥사로 쓰임 받게 하셨다”고 말했다.
이 목사는 국내는 물론 북·미 아프리카 유럽 등 전 세계를 돌며 집회를 인도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은 “기드온의 300용사 같은 제자 700명을 세우고 전 세계 700개의 교회를 세우라’는 비전을 주셨다. 그는 “단기간의 부흥 집회를 통해 한 사람이 충분히 내적 치유와 영적 전쟁을 이해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으로 나아가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느끼던 때였다”고 했다.
본격적인 치유 사역과 제자 양성은 2001년 세워진 ‘영혼의샘 세계선교센터’가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현재까지 100여명의 제자들을 양성했고 일부는 대구와 캐나다 토론토, 미국 LA 등에 백송교회 지교회를 세워 파견했다. 평신도 사역자였던 이 목사는 사역의 지경을 넓히고 말씀 사역에 대한 갈증을 느끼면서 서울신학대 신대원에서 신학 공부를 하고 2015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하나님이 맡겨 주신 영혼들을 향한 불타는 사랑이 늘 내 안에 치솟는다”는 이 목사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이 맡겨 주신 일을 최선을 다해 감당하고 싶다”고 말했다.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