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단편 ‘세계의 수도’ 첫머리에 등장하는 얘기다.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에는 프란치스코의 약칭인 ‘파코’라는 남자 이름이 넘쳐나는데, 어느 날 마드리드에 들른 한 남성이 신문사 개인 광고란에 이런 글을 실었다. ‘사랑하는 파코, 화요일 저녁에 몬태나 호텔로 찾아오길 바람. 모든 걸 용서하마. 아빠가.’ 그러자 이튿날 호텔 앞에는 800명의 소년들이 모여들었고 이들을 해산시키느라 스페인 경찰 1개 중대가 동원됐다.” 화자가 ‘마드리드의 농담’이라며 꺼낸 이 에피소드로 소설은 시작된다.
1936년 이 작품이 세상에 나온 이래 마드리드의 농담은 이리저리 덧붙여지면서 어느 인터넷 블로그엔 이런 식으로도 각색돼 있다. 호텔 앞 약속 장소엔 파코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 수백명이 저마다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얘기까지는 비슷했다. 여기에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방황하고 있으며 용서를 원하고 있는지 말해준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용서하는 것’ 같은 내용이 더해지면서 ‘용서’를 주제로 그럴듯한 예화나 읽을거리로 소개돼 있었다.
얼마 전 나도 용서를 구해야 할지 말지 고민에 빠진 적이 있었다. 어떤 모임을 이끄는 칠순 넘은 대학 은퇴 교수와 이런저런 약속을 했다가 지키지 못하게 됐다. 난감해진 상황에서 그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메일함을 열어보니 내가 연락도 없이 약속을 어긴 데 대한 섭섭한 마음이 일부 담겨 있었는데 편지 말미에 적힌 내용에 한참 동안 눈길이 갔다. ‘나는 모든 사람이 사랑할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암 투병을 통해 얻은 깊은 깨달음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독 언론인의 역할이 더욱 돋보이길 기도하고 소망합니다.’
마치 파코의 아버지처럼, 노교수는 내가 전화를 할까 말까 고민하고 차일피일 미루는 사이 먼저 쿨하게 용서의 마음을 건넨 것이다. 30년 전 암과 사투를 벌이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정말 중요한 인생의 가치를 깨달았다면서.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그와 통화했다. 결과는 해피엔딩.
소설 속 파코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난다. 2류 투우사들이 묵는 펜션에서 웨이터로 일하던 소년 파코는 마드리드의 여느 아이들처럼 멋진 투우사가 되고 싶어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동료와 장난으로 투우를 펼치다가 식도에 찔려 과다출혈로 죽는다. 어이없고 허망한 결말이었다. 아무 준비 없이 맞닥뜨려야 하는 죽음,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죽음이었다. 이런 식으로 끝나는 인생이 일상적인 것처럼 그려져 잔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죽기 직전 파코는 회개 기도를 했다.
“오 나의 하나님, 제 모든 사랑을 받기에 족하신 당신을 능멸한 죄를 깊이 뉘우치나이다. 그리하여 저는 결연히 다짐하오니….” 그의 기도는 여기서 멈췄다. 심장이 멎었기 때문이다. 최후의 순간에 신에게 용서를 구할 시간마저 없이 인생의 커튼이 닫힌 것이다. ‘설마, 내 인생이 이렇진 않겠지.’ 어느 누가 파코처럼 죽음을 맞이하지 않겠다고 100% 확신할 수 있을까.
“여러분 오늘 분명히 결정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예수님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아버지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달 초 방한한 빌리그레이엄전도협회 회장 프랭클린 그레이엄 목사가 7만여 청중 앞에서 절박한 어조로 외친 메시지다. 반세기 전 그의 아버지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서울 여의도광장 집회에서 호소한 내용 그대로였다. 수천명의 비신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다.
용서를 구하면 한없이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주는 대상이 있다는 믿음의 스토리는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더 거슬러 올라가 2000년 전이나 오늘이나 달라진 게 없다. 용서받고 싶은데 용서해주는 이가 늘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아는 사람은 안다. 소설 속 마드리드의 농담은 사실 농담이 아니다.
박재찬 종교부장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