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설립 역사가 짧은 신생 학교였다. 그래서인지 열정이 넘쳤다. 전체적인 면학 분위기는 일류대에 최대한 많은 숫자의 학생들을 진학시키는 걸 목표로 날마다 달려가는 시스템이었다. 진학 우선순위는 대학 이름과 객관적 레벨이 더 중요했다. 학생들이 선택하는 전공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이런 학교 분위기는 점점 가시적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우리 학교는 신생 고등학교 중 가장 많은 숫자의 학생들을 대학에 보내는 학교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학생들을 우등반과 열등반으로 구분하는 시스템도 그대로 유지했다. 중압감이 느껴지는 체벌과 학생 통제도 여전했다.
그런 빡빡한 흐름 속에 날마다 시달려야 했던 나는 쉽게 적응하기 어려웠다. 그 여파로 우등반에서 열등반으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그렇지만 크게 낙심하지 않았다. 나는 원래 낙천적 성향의 미대 지망생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여러 대회에서 상을 휩쓸었고, 방학을 마칠 즈음이면 같은 반 친구들이 찾아와 미술이나 기술 숙제를 해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소질과 재능이 풍부했기에 성적과 등수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가장 큰 문제는 ‘평생 배고픔이 있을 수 있는 화가의 삶’을 반대하는 집안 분위기였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엔 공부를 꽤 잘하는 우등생이었고 거기에 더해 그림도 잘 그리며 온갖 상을 받는 특기를 뽐냈다. 그래서 집안에서도 환영을 받으며 이웃들에게도 자랑거리가 되는 그런 시절이었다.
하지만 ‘고3’ 타이틀은 향후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섬세하고 꼼꼼하게 인생의 미래를 준비하는 때였다. 이런 가운데 집안 반대는 쉽게 넘을 수 없는 장대 높이의 커다란 허들처럼 보였다. 특히 아버지와의 말다툼은 잦았고 그 양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심각한 상황으로 번져갔다.
학력고사 날짜가 다가오면서 나는 차근차근 마음을 가다듬었다. ‘나 혼자만 꿈을 포기하고 다른 꿈을 꾼다면 우리 가족 전체가 평안한 마음으로 함께 더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거야.’ 마음 한쪽에서 생각이 속삭였다. 이 속삭임은 계속됐고 나는 세뇌하듯 습관처럼 읊조리기 시작했다. 결국 캔버스를 부숴 땔감으로 던졌고 붓도 꺾었다. 연습으로 채색했던 스케치북은 가슴 속 깊은 창고에 묻었다.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닐지라도 당시 가족들의 평안과 안녕을 위해 결정했던 나의 양보와 내려놓음이 사도 바울 선생의 모습으로 점철되며 데자뷔로 스쳤다. 바울이 누구인가. 그는 지적으로 당대 최고 유대교 학파에 속해 대단한 경지에 이르렀던 사람이었다. 게다가 수많은 경험도 소유했던 사람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며 회심해 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지 않았던가.
나는 오늘 사도 바울의 모습에서 공과대 입학 후 펼쳐진 다양한 색채의 풍경화들을 이미 스케치하고 계셨던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한다.
정리=최경식 기자 ks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