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난민, 가해자·피해자… 난 두 얼굴 남자”

입력 2023-06-15 20:25
2016년 첫 장편소설 ‘동조자’로 퓰리처상을 받은 베트남계 미국 작가 비엣 타인 응우옌이 후속작 ‘헌신자’의 한국어판 출간을 계기로 초청돼 15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기자 간담회를 갖고 있다. 민음사 제공

반식민주의가 다시 불려나오는 것은 이민자·난민과 관련이 있다. 2000년대 이후 영미 문학을 대변하는 목소리는 이민자 작가들, 다인종 작가들에게 넘어간 것처럼 보인다. 이들이 식민주의 서사를 피식민자의 관점에서 재구성하면서 주요 문학상을 휩쓸고 있다.

이 흐름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이 베트남계 미국인 작가 비엣 타인 응우옌(52)이다. 그는 2016년 첫 장편소설 ‘동조자(The Sympathizer)’로 퓰리처상을 받았고, 미국의 베트남전쟁에 대한 서사를 완전히 바꿔놓았다는 평을 들었다. 이 작품은 박찬욱 감독이 연출하고,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샌드라 오가 출연하는 HBO 드라마로 제작되고 있다.

‘동조자’에서 속편을 예고했던 작가는 2022년 ‘헌신자(The Committed)’를 출간했다. ‘동조자’가 1975년 4월 사이공 함락 직후 헬기로 베트남을 탈출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면, ‘헌신자’는 베트콩 수용소에서 가혹한 고문과 철저한 ‘재교육’을 받은 주인공 ‘나’와 친구 ‘본’이 1980년대 초 보트를 타고 베트남을 탈출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동조자’가 베트남전 직후 미국으로 건너간 베트남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미국의 식민주의를 돌아보게 한다면, ‘헌신자’는 베트남 공산정권을 탈출해 프랑스 파리에 도착한 베트남계 난민들로 구성된 밑바닥 세계를 배경으로 식민주의의 현재를 그려낸다. 프랑스는 과거 베트남을 지배한 나라이자 프랑스 신부와 베트남 여성 사이에 태어난 “잡종 새끼”인 주인공에겐 아버지의 나라이기도 하다.

“나는 스파이, 고정간첩, CIA 비밀요원, 두 얼굴의 남자입니다.” ‘동조자’는 이 흥미로운 문장으로 시작된다. 남베트남 특수부 소속 육군 대위로 장군 비서로 일하는 주인공은 사실 베트남의 공산혁명을 위해 일하는 북베트남의 스파이이다. 그에겐 피로 우정을 약속한 두 명의 친구 ‘만’과 ‘본’이 있는데, 만이 그를 스파이로 포섭했고 지령을 내린다. 본은 수많은 베트콩을 처단한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두 친구의 진실을 알지 못한다. 각각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을 상징하는 두 친구 사이에서 주인공은 ‘두 얼굴의 남자’로 살아가며 두 세계를 오간다.

비엣 타인 응우옌은 ‘동조자’ 뒷편에 수록된 인터뷰에서 “우리는 피해자들일뿐 아니라 가해자들이기도 하다”며 “이것은 우리 모두가 직시하기 매우 힘들다고 생각하는 우리 역사의 일부이다”라고 말했다. ‘동조자’와 ‘헌신자’는 식민주의에 대한 탁월한 비판으로 평가받지만 베트남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독립과 자유의 이름으로 스스로를 해방시켰지만, 그런 다음 곧 우리의 패배한 동포들에게서 바로 그것을 박탈했던 것이다.” 그래서 “내일 우리는 바다로 간 저 수만 명에, 즉 혁명으로부터 달아난 난민 대열에 합류할 것이다.”

‘헌신자’는 ‘보트 피플’이 도착한 파리에서의 삶을 그린다. 그것은 지금도 이어지는 이민자와 난민, 그 자손들의 모습일지 모른다. “모든 난민은 어딘가에서 시작해야만 했고, 그 어딘가는 밑바닥이었습니다.” 그들이 파리에서 삶을 의탁한 인물은 그들과 같은 배를 타고 베트남을 떠났던 갱스터 ‘보스’다. 주인공과 본은 보스의 명에 따라 베트남 식당에서 일하게 되는데, 그곳은 식당으로 위장한 마약 밀매 조직이다.

혼혈, 난민, 스파이라는 겹겹의 이중성을 가진 주인공은 스스로를 ‘두 얼굴의 남자’라고 소개한다. 그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영원한 외부자의 시선으로 두 세계를 넘나들며 양쪽 모두에 동조하고 모두에 소외된다.

출판사 민음사는 ‘헌신자’를 새로 내놓으면서 이전에 두 권으로 분권했던 ‘동조자’를 한 권으로 묶어 재출간했다. 한국어판 출간을 계기로 초청된 비엣 타인 응우옌은 15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기자들과 만나 “전쟁과 식민지배, 인종차별 같은 이 책의 주제들은 심각하고 무겁고 슬플 수밖에 없기 때문에 흥미롭고 유머러스하게 접근하기 위해 스파이소설을 채택했다”고 말했다. 또 “주인공을 일부러 혼혈로 만들었다”면서 “문화적 차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고, 우리 삶 속에서 식민지화 어떻게 지속되고 있는지 얘기하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두 소설은 식민주의에 대한 분석과 스파이소설로서의 재미를 동시에 제공한다. 이야기에는 놀라운 반전이 숨겨져 있다. 전쟁, 혁명, 식민주의, 문화에 대한 풍자는 유머러스하면서도 지적이다. 작가는 미국 USC대학에서 영문학과 민족학을 강의하며 베트남계 미국인들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해 왔다.

제목으로 사용한 ‘동조자’와 ‘헌신자’라는 말은 주인공을 묘사한다. 작가는 “주인공은 두 얼굴의 남자로 공산주의에도 동조하고 자본주의에도 동조한다. 어느 주의, 어느 편에도 공감할 수 있기 때문에 훌륭한 간첩일 수 있다. 하지만 둘 사이에 깊은 갈등이 있으면 어느 한 편을 들 수 없기 때문에 내적 갈등을 겪게 된다”고 설명했다.

주인공이 가진 혁명에 대한 환상이나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환상은 모두 깨져버린다. 그럼에도 그는 혁명가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한다. 작가는 “실패한 혁명에도 불구하고 혁명가로 살아가는 주인공은 어떤 혁명에 헌신하고 복무해야 하는가. ‘헌신자’에서 그걸 얘기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