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처럼 날씨가 변덕을 부릴 때는 옷장 앞에서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으니 가볍게 걸칠 겉옷이 필요하다. 한낮은 그런대로 괜찮지만 반소매 하나만 입기에는 밤공기가 서늘하게 느껴진다. 그 옷가게를 마주친 건 기역자로 구부러진 담장을 막 돌아 나왔을 때였다. 그날 나는 목적 없이 서울 연남동 끝자락을 산책했다. 어디선가 버터 냄새가 풍겨왔고, 이따금 식당에서 접시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골목을 돌자마자 나는 그 외투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리고 홀린 듯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평소에 나는 옷 주인이 따로 있다고 믿는 편이다. 그런 옷은 한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듯 맞춤하게 어울린다. 내가 아껴 입던 외투는 소매가 닳아서 더 이상 입을 수 없었다. 같은 옷을 사려고 했지만 품절이었다. 외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나를 보고 주인이 한번 입어보라고 권했다. 홑겹이라 그런지 가볍고 쾌적하게 몸에 감겼다. 부들부들하니 구김도 적었고, 방수 기능이 있어 비를 맞아도 툭툭 털면 그만이었다. “내가 쓰고 싶은 건/ 여름 외투/ 겨울보다 추운 실내에서/ 어깨를 감싸주는/ 그런/ 시”(‘여름 외투’, 문학동네, 2023). 산책하다가 예정에 없던 지출을 하게 된 까닭은 얼마 전에 이 시집을 읽었기 때문일까.
가게를 나서며 ‘여름 외투’ 같은 친구를 떠올렸다. 그는 잊을 만하면 가끔 다정한 안부를 물어온다. 어쩌다 고민을 털어놓으면 그는 무거운 위로보다 산뜻한 악수를 먼저 건넨다. 오래전 그는 내게 말했다. “우리, 아무것도 남지 않는 사이라 참 좋다”라고. 처음엔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조금이나마 알 것도 같다. 다른 이에게 쉽게 무게를 지우지 않는 그의 신중한 배려를. 그와 느슨하고도 정다운 우정을 이어온 지 20년이 다 돼 간다. 올해 그의 생일 선물은 ‘여름 외투’가 어떨까. 새 옷을 입고 사뿐하게 걸어본다.
신미나 시인 겸 웹툰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