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라(47)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매번 놀라는 지점이 있다. 어쩌면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술술 이어가는지.
“그의 칼날이 새의 다리를 스쳤다. 칼에 벤 새의 다리에서 피 대신 실이 흘러나왔다.”
“그래서 부소장님은 그 뒤로 양들에게 가까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 부소장님의 고시원 방으로 양이 찾아왔다.”
칼에 베었는데 실이 흘러나오고, 양이 사람을 찾아온다. 정보라는 현실과 환상, 인간과 비인간을 뒤섞으며 천연덕스럽게 이야기를 전개한다. 정합성이란 건 의미가 없다는 듯이. 내가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다는 건 다 알지 않느냐는 듯이.
지난해 ‘저주 토끼’로 영국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랐던 정보라의 신작 ‘한 밤의 시간표’는 연작소설집이다. 귀신 들린 물건들을 모아놓은 연구소를 배경으로 일곱 편의 기묘한 이야기를 펼친다. 이 이상한 연구소에는 야간에 근무하는 직원들이 있는데, 이들은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복도를 돌며 잠긴 문들을 확인하는 이상한 일을 한다. 소설의 화자 역시 연구소의 야간근무 직원으로 동료들이 듣거나 경험한 이상한 이야기들을 전해준다. 귀신 들린 물건들을 보관하는 연구소라는 설정에서부터 짐작하겠지만 소설에는 괴담이 가득하다. 가면 갈수록 더 거리가 늘어나는 터널이 나오고, 섬뜩한 전화가 걸려오고, 집의 모든 물건들이 일제히 한 방향을 바라보는 일이 벌어진다.
정보라의 소설을 읽는 것은 왜 이런 이상한 이야기를 쓸까에 대한 질문을 품고 그 답을 찾아 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등장시키는 인물들은 다 여성들이고, 특히 약자나 소수자들이다. 이들을 구하고 이들에게 쌓인 원한을 풀고 가해자들을 응징하기 위해 작가는 환상적인 수법을 사용한다. 동물실험용으로 쓰이는 양이 가난한 중년 여성을 돕고(‘양의 침묵’), 새떼가 비통하게 죽은 처녀의 복수를 해주고(‘푸른 새’), 살해당한 여성이 기르던 고양이가 남자를 찾아간다(‘고양이는 왜’).
괴담의 공간인 연구소는 상처 입고 잊혀진 존재들을 기억하고 돌보는 공간이기도 하다. 성소수자, 장애인, 혼자 애 키우는 중년여성 등이 그곳에서 일하며 삶을 지탱해나간다.
정보라는 줄기차게 여성 이야기를 쓰고, 원한과 복수라는 주제를 다룬다. 여성들의 원한과 상처는 다양하다. ‘양의 침묵’에 나오는 부소장님은 큰오빠의 사업 빚을 떠맡았고, 결혼 후에는 남편의 도박 빚과 폭력에 시달린다. ‘손수건’에는 아들을 지독하게 편애하면서 딸들을 학대하는 어머니가 그려진다.
“그렇게 집안의 모든 문제는 구정물처럼 아래로 아래로 흘러 떨어져서 그 집안 모든 사람에게 가장 만만한 존재 위에 고이고 쌓였다. 대부분의 경우 마지막에 그 구정물을 감당하는 사람은 취약한 위치에 있는 여성이었다… 가장 만만한 구성원의 피와 골수를 빨아먹어야만 가족이라는 형태가 유지된다.”
‘고양이는 왜’에서는 남편이 죽은 후 남편 친구에게 성적 착취를 당하다 이를 거부하자 죽임을 당한 여성이 나온다. “‘왜 안 만나줘’를 주장하는 남성의 여성 살해 역사는 유구하다.” 정보라는 그렇게 살해된 여성이 죽은 귀신의 모습으로 남자를 만나러 찾아오게 한다. “죽어 있든 살아 있든 ‘왜 안 만나줘’에 대한 답변으로 여자가 만나러 와줬으면 응당 기뻐해야 할 일이다”라며.
이야기는 초현실적이지만 여성 인물들이 처한 상황은 매우 현실적이다. 정보라는 여성들의 상처와 울분에 주목하면서 통쾌한 복수극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화장실 변기에서 머리가 나오고 그 머리가 자라 주인공을 변기 속으로 집어넣어 버리는 1998년 발표한 그의 첫 단편소설 ‘머리’에서부터 이어진 정보라 소설의 주제다. 그런 점에서 정보라의 환상소설은 현실에 대한 분노의 서사로 읽을 수 있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