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종류의 비참과 곤경이 인간을 덮쳤지만,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왔다가 사라졌다. 꽃잎 위에 바람이 불 때 꽃은 잠시 고개를 숙이지만, 바람이 멎으면 그것은 다시 일어난다.”
세계대전 후 유럽의 모습을 신학자 칼 바르트는 이렇게 시적으로 묘사했다. 종전 선언을 한 국가들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전쟁 이전처럼 힘의 경쟁을 펼치는 것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세계대전의 후유증에서 빨리 빠져나와야 했지만, 수천만의 생명을 앗아간 비극을 되새김질하며 사람됨의 의미를 기억하는 것도 중요했다. 하지만 인간이 끔찍한 과거로부터 배우기보다는 비극을 잊기를 선호해서인지, 세계는 이념과 군비 경쟁 속에서 냉전체제라는 또 다른 위기를 맞이했다.
하나님께서 망각이라는 선물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렇지 않다면 인류는 옛일에 대한 후회와 수치심에 사로잡혀 오늘에 충실하지 못하고 미래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영어 단어 ‘gift(기프트)’는 선물도 되지만 독도 될 수 있다. gift는 영어로 ‘선물’이지만 독일어로는 ‘독’이다. 인간은 잊어서는 안 될 것을 잊음으로써 과거가 주는 소중한 가르침을 무위로 만들고 불필요한 갈등과 위기를 자초해 왔다.
2020년 초부터 약 3년간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이 이어졌다. 그 기간 우리는 당연시하던 삶을 억지로라도 멈춰 세웠다. 속도 경쟁을 펼치다 급제동하자 삶은 관성 때문에 균형을 잃고 뒤죽박죽이 되었다. 그러나 팬데믹 상황에서도 ‘위기는 곧 기회’라는 낡은 명언이 빛을 발했다. 사람들은 한때 유명했던 책 제목처럼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에 주목했다. 분주함에 치여 군중 속에서 습관에 가려 보지 못했던 삶의 중요한 가치들을 찾고자 했다.
교회도 사회의 일부인 만큼 위기를 마주했고 위기를 기회로 변환하고자 노력했다. 사람과 사람이 못 만나는 상황은 큰 도전이었지만, 잠시 멈춰선 삶은 신앙의 본질과 교회의 공동체성을 재발견할 공간이 돼줬다. 사람들은 수많은 행사와 분주한 활동에서 신앙의 힘을 끌어올리려던 기존 방식에 감히 의문을 던졌다. 대신 온라인 예배라는 생소한 형식으로 예배를 꾸준히 드렸고, 기독교 양서를 읽고 토론하는 자발적 모임들을 만들었다. 기존 개교회주의를 넘어서는 성도의 교제가 실험됐고 교회에서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던 여성과 청년 중심으로 새로운 담론의 장이 열렸다.
지난 5월 11일 정부는 엔데믹을 선언했다. 이에 맞춰 관계가 재형성되고 예배당에 교인들이 모이고 크고 작은 집회가 열리며 교계에서도 일상 회복이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회복의 소식을 전하는 목소리가 마냥 즐겁게 들리지는 않는다. 행사의 계절인 여름을 앞두고 교역자들은 다시 새벽부터 밤까지 과로에 시달린다. 모임이 다시 활성화되면서 일회용품 쓰레기가 교회 한구석에 쌓인다. 다른 교회도 하니 우리 교회도 해야 하지 않겠냐며 단기 선교팀이 급조된다. 코로나 이전 모습을 되찾으려는 다양한 활동을 크게 응원하면서도 다른 한편 팬데믹 기간 ‘멈춰서 비로소 보였던 것들’을 너무 빨리 잊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도 하게 된다.
이럴 때일수록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과 화해하셨고, 이로써 세상에서 하나님의 용납과 사랑의 대상이 아닌 것이 없음이 드러났다는 본질적 가르침에 더 귀 기울여야 할 것 같다. 팬데믹은 세상을 혼란스럽게 했지만 여전히 세상의 일부였다. 하나님께서 전염병 자체를 일으키시거나 기뻐하지는 않았지만 깨어진 세상에 현존하시며 연약한 세상을 붙들고 계셨다.
그때에도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고 구체적 상황 속에서 우리를 위해 이야기하고 계셨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 만큼 그 위기의 시대는 우리가 뒤로 흘려보낼 무가치한 시간이 아니다. 엔데믹과 함께 우리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음에도 ‘멈춰서 비로소 보였던 것들’을 놓쳐서는 안 될 이유가 여기 있지 않을까.
김진혁 교수(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