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 일본의 한류 20주년, 문화의 힘

입력 2023-06-15 04:07

일본에서 한류는 언제 시작된 것일까. 대체로 2003년 NHK 위성방송에서 드라마 ‘겨울연가’를 방영한 것을 출발점으로 본다. 바로 1차 한류다. ‘겨울연가’ 방영 당시 주인공 배용준은 ‘욘사마’로 불리며 일본 중장년층 여성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다만 한국의 KBS가 NHK에 ‘겨울연가’의 일본 내 판권을 모두 넘기는 바람에 NHK가 350억원 이상의 이익을 얻은 데 비해 KBS 수익은 10억원이 채 안 됐다. 당시 한국에서는 한류를 예상하지 못한 데다 이를 통한 경제적 마케팅은 생각조차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만 실속을 챙겼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겨울연가’ 덕분에 NHK를 비롯해 일본 주류 미디어들이 경제적 이익을 위해 한국 드라마와 스타를 잇따라 소개하면서 한류가 확산된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2000년대 후반 보아, 카라, 동방신기를 필두로 K팝이 중심이 된 2차 한류 열풍이 불었다. 2차 한류는 일본의 젊은 층으로 대상이 확산된 것이 특징이다. 또한 한국의 엔터테인먼트 회사들이 일본 측과 손잡고 수익 모델을 구축한 것도 이때다. 이어 2010년대 중반 한국 패션과 화장품 그리고 음식 등이 SNS를 통해 일본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는데, 바로 3차 한류다. 한류가 일본 젊은 층의 일상생활 속으로까지 스며든 것이다.

한류 열풍은 한·일 관계 악화에 따른 영향을 받기도 했다. 특히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하고 아키히토 일왕에게 사과를 요구한 것은 일본의 혐한 정서에 기름을 끼얹는 계기가 됐다. 실제로 일본 주류 미디어들이 한국 드라마 방영과 K팝 가수 출연을 취소하는 등 한류를 억제하는 분위기가 만연했다. 그리고 2018년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과 일본 정부의 화이트리스트 배제 결정, 그에 따라 시작된 한국 내 반일 불매운동인 ‘노재팬’ 등이 이어지면서 한·일 관계는 역대 최악의 상황이 됐다.

하지만 일본에서 젊은 층의 일상에 파고든 한류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일본 방송국들도 2010년대 말부터는 K팝 스타 출연을 허용하며 한류를 다시 받아들였다. BTS, 트와이스, 블랙핑크 등 전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K팝 스타들을 계속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일본에서 4차 한류 열풍을 일으키는 결정타가 됐다. 넷플릭스 등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통해 한국의 영화, 드라마, 예능을 대거 소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과 ‘이태원 클라쓰’의 높은 인기는 이런 경향을 대표한다. 게다가 현재 일본의 젊은 세대는 한국을 동경하고 한국 문화를 선망한다는 점에서 과거 세대와 완전히 다른 흐름을 보여준다. 이제 한류는 일시적 열풍이 아니라 문화로 정착한 상태다.

한국에서도 올해 ‘일본 붐’이 엄청나다. 애니메이션 ‘슬램덩크’와 ‘스즈메의 문단속’의 인기나 한국 관광객의 일본 러시 현상은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 국민이 윤석열정부의 대일 정책을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강제징용 제3자 변제 배상안과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에 대한 정부 입장은 국민 여론과 배치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일본 국민 모두 정치적 상황에 의해 교류가 위축되는 것을 더 이상 바라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이제 ‘정치는 정치, 문화는 문화’라는 분리 의식이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 정부가 양국 국민 사이의 문화적 친밀감을 토대로 건강한 한·일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마침 2025년은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이 되는 해인 만큼 지금부터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하면 어떨까.

장지영 문화체육부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