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에 ‘갑질’한 브로드컴이 공정거래위원회의 제재를 받게 됐다. 공정위는 13일 브로드컴이 내놓은 동의의결안(자진 시정방안)을 기각했다고 밝혔다. 동의의결안이 최종 단계에서 기각되는 건 이 제도가 도입된 2011년 이후 처음이다. 최근까지 브로드컴과 협의해 동의의결안을 만들던 공정위가 돌연 삼성전자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공정위는 삼성전자가 2021년 1월부터 올해까지 3년간 브로드컴과 맺은 장기계약이 불공정하다고 보고 조사에 착수했다. 삼성전자는 계약 기간 동안 브로드컴의 스마트폰 부품을 매년 7억6000만 달러 이상 구매하기로 계약했다. 실제 구매 금액이 이에 미치지 못할 경우, 차액만큼 브로드컴에 배상하는 내용도 계약에 담겼다.
그러나 공정위는 지난해 8월 브로드컴의 동의의결 신청을 수용하며 조사를 중단했다. 동의의결은 법 위반 혐의가 있는 사업자가 시정방안과 피해구제방안을 제시하면 위법 여부를 따지지 않고 사건을 신속하게 종결하는 제도다. 이후 브로드컴은 공정위와 협의를 거쳐 반도체 중소기업·인력 양성 상생 기금 200억원 조성 등의 내용을 담은 자진 시정안 마련, 지난 1월 발표했다. 최근에는 산업통상자원부 등 부처 간 협의도 거쳤다.
그러나 공정위는 이날 최종적으로 동의의결안이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이런 이례적인 결정은 지난달 삼성 측이 언론을 통해 브로드컴 동의의결방안의 부당성을 주장한 게 결정적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졌다. 공정위 핵심관계자는 “처음에는 삼성의 언론플레이에 그동안 동의의결을 진행해 온 실무진이 격양됐었다”면서 “국내 대표 기업이 불이익을 받으면 안 된다는 공정위 수뇌부의 정무적 판단이 작용한 결론”이라고 말했다.
한기정 공정위원장을 수장으로 하는 공정위 전원위원회는 공정위와 브로드컴이 1년 가까이 협의해 만든 동의의결안의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거래질서 회복이나 다른 사업자를 보호할 수 있는 충분한 대안이 아니라는 것이다. 피해기업인 삼성전자에 대한 보상이 충분하지 않다는 점도 고려됐다. 전원위는 “최종동의의결안에 담겨있는 삼성전자에 대한 품질보증·기술지원 확대 등은 그 내용·정도 등에 있어 피해보상으로 적절하지 않다”며 “거래상대방인 삼성전자도 시정방안에 대해 수긍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공정위는 즉각 브로드컴 제재 절차에 재착수한다는 계획이다. 올해 안에 제재 수위를 결정한다는 목표다. 삼성전자는 지난 7일 동의의결안 채택 여부를 결정하는 전원회의에서 브로드컴과의 불공정 계약으로 4000억원의 피해를 봤다고 주장했다. 더 저렴하게 부품을 구매하지 못해 발생한 피해와 과잉 재고로 인한 손실을 더한 규모다. 공정위가 향후 과징금 부과 등 위법 판단을 내리면 향후 삼성전자가 민사적으로 브로드컴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나설 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이번 공정위의 기각은 동의의결이 기업의 범법 행위에 면죄부를 준다는 그동안의 비판을 확인시켜줬다는 분석이다. 공정위 스스로 신청기업과 함께 만들어진 동의의결 방안이 제재보다 실효성이 없다고 밝힌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황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면죄부 지적은 본래 받을 처벌보다 가벼운 시정 방안을 제시해 공정위로부터 승인을 받으면서 비롯됐다”고 말했다.
세종=권민지 이의재 기자 10000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