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스파이 솜방망이 처벌 ‘관행’ 제동… 앞으로 ‘양형’ 세진다

입력 2023-06-14 04:08
국민일보DB

A씨는 국내 2차전지 제조·판매 업체인 B사에서 2009년 9월부터 약 8년간 신사업팀장 등으로 근무했다. 그는 2018년 1월 유사한 배터리 개발을 진행 중인 중국 회사로 이직하며 B사 리튬이온 배터리 관련 기술자료를 무단으로 반출했다. 1692개에 달하는 기술자료를 이동식저장장치(USB)에 옮겨 담거나 휴대전화로 촬영해서 나오는 방식을 썼다. 그는 2020년 3월 다시 스웨덴 배터리 회사로 이직하면서 B사 영업비밀 91개를 배터리 개발 참고자료로 쓰려다 덜미가 잡혔다.

1심 법원은 지난해 1월 A씨가 빼돌린 기술이 실제 제품 생산으로 이어지진 않았고, 초범이라는 이유 등을 들어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실형을 면한 것이다.

국가정보원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적발된 산업기술 해외유출 사건은 총 93건으로 피해 규모는 약 25조원으로 추산된다. 적발되지 않은 사건까지 고려하면 실제 피해는 훨씬 막대한 것으로 본다. 하지만 A씨 사례처럼 법원은 초범, 피해액 특정의 어려움을 이유로 집행유예 등의 ‘솜방망이 처벌’을 내리고 있다. 2019~2022년 선고된 기술유출 사건 중 실형은 10.6%에 불과했다. 영업비밀 해외유출 범죄 형량도 평균 14.9개월 수준에 그친다.

하지만 앞으로는 이런 기술유출 사범들에 대한 처벌 수위가 올라갈 것으로 전망된다. 대법원은 새로 출범하는 9기 양형위원회에서 기술유출 범죄를 양형기준 수정 범죄군으로 선정했다고 13일 밝혔다. 반도체·2차전지 등 국가 핵심기술을 빼돌리는 사건이 이어지자 산업스파이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관계기관과 국민 목소리가 커진 데 따른 것이다. 양형위가 기술유출 범죄 양형기준을 정비키로 결정한 건 7년 만이다.

양형위는 오는 8월부터 논의를 시작해 내년 4월 기술유출 범죄 양형기준 수정을 완료한다는 방침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영업비밀 국외누설 등에 대한 법정형이 상향된 상황 등이 새 양형기준에 반영된다”며 “양형도 함께 강화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원석 검찰총장은 “기술유출 범죄가 양형기준 수정 범죄군으로 선정돼 산업기술 보호가 더욱 두텁게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스토킹 행위, 동물학대 범죄 양형기준이 신설된다. 스토킹 범죄의 경우 처벌법이 2021년 10월 시행된 이래 다수 양형 사례가 축적된 만큼 명확한 처벌기준을 세운다는 취지다. 동물학대 범죄는 양형위에 접수된 일반 국민 의견 중 가장 많은 건수를 차지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대법원은 동물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졌고, 동물학대와 대인(對人) 범죄 사이 연관관계를 지적하는 연구가 늘어난 만큼 양형기준을 신설한다는 입장이다.

별도 양형기준이 없었던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 ‘공중밀집장소 추행’ ‘피감독자·피보호자 간음’ 범죄는 성범죄 양형기준에 새로 포함할 예정이다. 전반적으로 양형기준을 재정비해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 접수된 마약범죄도 논의 대상에 포함됐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