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식물의 정명

입력 2023-06-14 04:05

서울 청계천 산책길에서 화사한 분홍빛 꽃이 하늘거리는 커다란 자귀나무를 마주하니 이젠 여름이라 불러도 충분할 듯싶다. 여름의 어원이 ‘열음’이니 꽃은 이미 지고 열매를 열어야 하는 계절이기에 상대적으로 꽃이 귀한데, 한여름 자귀나무꽃은 신비롭고 또 매혹적이다. 돌아오다 조계사 뒷길에서 만난 짙은 주황빛 능소화도 뜨거운 여름의 시작을 외치고, 집 근처 서울공예박물관 마당엔 산수국과 노루오줌이 형형색색 한껏 뽐낸다. 모두 여름을 대표하는 꽃들.

참, 노루오줌이라 하면 좀 없어 보일까? 속명인 아스틸베(Astilbe spp.)라 부르는 게 유행이다. 분홍빛 토종 노루오줌과 달리 색색의 원예종이 개발돼 아스틸베속이라 부르는 것이 원칙이나, 정작 우리 자생종인 노루오줌까지 아스틸베라 부르는 부작용이 생긴다. 부담스러운 단어가 이름에 포함되니 라틴어 속명을 대신 뭉뚱그려 쓰려는 의도는 이해되지만, 90년 전 조선인 연구자들로 조선박물연구회를 결성해 4년간의 연구 끝에 내놓은 ‘조선식물향명집’(1937)의 성과를 간과한 결과다. 당시 조선인 식물학자들에게 한글로 된 식물목록과 도감을 편찬한다는 건 간절한 꿈이었다. 일제의 박해를 이겨내며 조선식물향명집을 발간하면서 한글 식물명을 정한 방식은 조선어학회가 ‘한글 맞춤법 통일안’(1933)을 만들 때 표준말을 정하던 방식인 사정(査定)이었다.

손쉬운 명명(命名)의 방법이 아닌 실제 민중(언중)이 상용하는 이름을 지역별로 낱낱이 조사해 결정하는 사정(査定)을 제1원칙으로 삼은 덕에 우리는 선조들이 지역에서 실제 불렀던 진달래, 얼레지, 민들레 등 아름다운 우리 이름을 이어받았다. 더불어 노루오줌, 쥐오줌풀, 며느리밑씻개, 개불알꽃 등 지금은 조금 불편할 수 있는 것도 받았지만 그 당시 우리 민족의 직관과 해학인 점을 존중한다. 여름내 만개한 노루오줌을 통해 가치의 혼돈이 일상인 시대일수록 올바른 이름을 불러주자고 다짐한다.

온수진 양천구 공원녹지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