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인 고객 손실 보전에만 적극적… 증권 업계 이중 잣대

입력 2023-06-13 04:06

SK증권을 비롯한 다수의 증권사는 지난해 ‘레고랜드 사태’로 인해 랩어카운트(랩)·신탁 상품에서 발생했던 대규모 손실과 이로 인한 환매(고객 투자금을 중도에 돌려주는 것) 중단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온갖 편법을 저질렀다. 랩·신탁 상품을 팔 때 고객에게 제시했던 수익률을 맞춰 손실을 보전하기 위해 불법 소지가 있는 자전거래 방식을 동원(국민일보 5월 23일자 1·3면 보도)한 데 이어 이번에는 비공식적으로 손실을 보전해주는 행태까지 확인됐다.

12일 금융권에 따르면 SK증권은 지난해 3월 채권형 신탁에 가입했던 법인 고객 A사에 투자 손실분만큼의 금액을 합의금으로 지급했다. SK증권은 만기가 짧은 채권형 신탁을 팔아 모은 자금으로 장기 채권에 투자하는 만기 불일치 운용을 하다 사고를 낸 것인데 “이런 불건전 운용에 대한 민사 소송을 걸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기 위해 A사에 합의금을 지급한 것으로 전해졌다.

SK증권은 고객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밝혔다. 앞서 KB증권도 랩·신탁에 투자했던 법인 고객의 손실을 보전하기 위해 하나증권과 편법 자진 거래를 벌였다가 금융감독원의 조사를 받고 있다. 당시 KB증권은 해명 자료를 통해 “고객의 2차 피해를 막기 위해 유동성을 공급한 것”이라면서 “선한 의도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런 선한 의도는 개인 고객이 아닌 ‘큰손’에만 적용되고 있다. 과거 수천명의 개인 고객에게 조 단위 피해를 줬던 라임자산운용(라임) 등 펀드 사기 사태 당시 해당 증권사들은 “책임은 투자자 본인에게 있다”는 논리를 펼치며 보상에 미온적이었다.


실제로 이번 랩·신탁 환매 중단 사태에서 선한 의도를 주장했던 KB증권은 2018~2019년 판매한 포트코리아 그린 에너지 펀드 등의 480억원 상당 환매 중단으로 피해를 본 개인 고객들에게 피해를 보상하지 않다가 지난 3월 피소당했다. 문제 펀드 투자자는 130여명으로 추산되는데 이 중 일부가 “KB증권이 펀드를 팔며 ‘보험에 가입돼 있어 원금이 보장된다’는 취지로 거짓 설명했다”며 법적 대응에 나섰다. 앞서 KB증권은 라임 사태 때도 자사 책임 소재가 명확한데 개인 고객들에게 피해를 보상하지 않고 버티다 “투자 손실의 60~70%를 배상하라”는 금감원 분쟁조정위원회 선고를 받고서야 움직였다.

SK증권도 5000억원에 이르는 환매 중단 사태를 낸 독일 헤리티지 펀드 개인 고객 피해를 보상하지 않다가 금감원 분쟁조정위가 “손실분을 100% 배상하라”고 판단하자 뒤늦게 나섰다.

증권업계의 이런 이중 잣대는 단기 성과에만 치중하는 영업 관행과 맞물려 있다는 분석이다. 수십년 신뢰를 쌓아야 실적이 나오는 개인 고객보다는 단기간에 거액을 투자하는 기업이나 연기금에 공을 들이고 있는 것이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연기금이나 기업은 수조~수십조원의 돈을 굴리는 큰손이라 증권사가 무시할 수 없는 고객”이라면서 “이들이 ‘수익률을 몇 퍼센트로 맞춰오라’고 지시하면 따를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금융권 관계자는 “이번 랩·신탁 사태는 대규모 환매가 중단됐다는 점에서 라임 사태와 근본적으로 같지만 증권업계가 고객 손실을 적극적으로 보전해주면서 입막음을 한 덕분에 피해 사실이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면서 “증권사들 스스로 신뢰를 갉아먹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김진욱 임송수 김준희 기자 realit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