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키에 짧은 목, 짝눈에 주근깨가 가득해 더 못생겨 보이는 얼굴의 외모였지만, 기타를 튕기며 복음성가를 들려주시는 이근형 전도사님(현 포도원교회 담임목사)의 털털한 웃음과 미소는 정말 100만 달러 짜리였다.
‘꿈보다 해몽’ ‘뚝배기보다 장맛’이라는 속담처럼 주일학교와 학생회, 청년회까지 전체를 다 맡아서 가르치고 잔소리까지도 늘 구수하게 하시는 그런 넉넉한 마음밭의 소유자.
매사에 열심을 담아 몸으로 뛰며 일하시는 전도사님 모습을 볼 때마다 학생들의 마음에도 점점 믿음의 싹이 자라났고 자연스럽게 그 사부님을 닮아가고 있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전파사를 운영하셨던 아버지 영향으로 엘비스 프레슬리, 루이 암스트롱, 밥 딜런, 비틀즈, 롤링스톤즈, 딥퍼플, 레드 제플린, 키스, 퀸, 조안 바에즈 등 날마다 팝송을 접하는 시간이 많았다. 자연스레 몸에 밴 음악 성향은 당대의 유명한 올드팝 아티스트의 음악들이었다.
50년 전 우리나라의 전파사는 모든 전자 제품들을 판매 수리 교환까지 하는 만물상이나 마찬가지였고, 유행하는 음악이 항상 흘러나오는 그런 곳이었다.
턴테이블 위를 돌아가고 있는 둥근 LP판을 신기한 듯 집어들고서 골목으로 나와 동네 꼬마들, 친구들과 함께 마치 비행접시처럼 하늘 위로 던지고 날리며 그 귀한 LP판들을 깨뜨렸다.
세계적인 팝시장의 뮤지션들을 좋아했고 영어 가사의 팝송들을 항상 접하고 살았기 때문에 원어 가사를 알파벳 스펠링이나 단어, 문장 등으로 표기하는 것이 아닌 들려오는 대로 소리가 나는 대로 한글로 받아 적어서 부르는 일명 ‘콩글리시 팝송’을 했다.
그런 나의 음악적 세계를 또 다른 형태의 감성적 호수에 빠뜨려 준 선배님이 바로 그 전도사님이셨다. ‘노래하는 시인 엉아’ 같은 수식어가 딱 어울리는 전도사님 모습에 주일학교 어린학생들과 청년들은 언제나 함께 빠져 녹아드는 그런 분위기였다.
나라를 세우신 ‘일등공신’의 공로와 훈장을 가지신 담임 목사님의 경건하고도 엄숙하기까지 했던 목회 분위기와는 반대 방향의 스타일, 그런 모습의 성향을 가지셨기에 다소 젊거나 어린 성도님들은 왠지 더 끌렸으리라 여겨진다.
지금 생각해 보면 최희준, 세시봉, 서수남과 하청일, 서유석, 최병걸, 김광석 등 이런 선배님들께서 보이셨던 가창력을 포함해 구수한 입담과 일맥상통한 그 전도사님은 아마도 선구자의 모습이셨다.
여행스케치가 보여주는 일상 생활사적 음악방향의 밑거름은 무엇이었을까. 따뜻한 영향력으로 전도가 된 같은 동네 같은 반 친한 동창들의 에너지였다는 생각이 든다. 바람인 듯 불어오는 순간 순간의 다양한 감정선들을 오늘도 그 시절의 순수함에 이끌려 적어본다. “모든 건 다 하나님의 예비와 준비하심이었구나.” ‘여호와이레’라고 다시금 적어본다.
정리=최경식 기자 ks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