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경기도 군포 한세대 음악관에서 마주한 유예은(21·여)씨는 피아노 연습에 한창이었다. 검은색 그랜드 피아노 2대가 놓인 연습실에서 곧 치러지는 기말고사와 ‘특별한 연주회’를 앞두고 어느 때보다 바쁜 일상을 보내는 모습이었다.
피아노를 전공하는 유씨는 15일 밀알복지재단(이사장 홍정길 목사)이 개최하는 ‘제20회 밀알콘서트’에서 인생 첫 오케스트라 협연을 앞두고 있다. 이번 콘서트는 밀알복지재단 설립 30주년 기념 콘서트이기도 하다. 그는 “첫 협연이라 많이 긴장되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다”며 수줍게 미소지었다.
장애·비장애인이 만드는 하모니
협연의 의미는 남다르다. 장애인인 유씨와 비장애인 오케스트라가 만드는 하모니이기 때문이다. 유씨와 연주하는 코리안챔버오케스트라는 1965년 창단됐는데 국내 민간 오케스트라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독주와 협주는 차이가 있다. 독주는 피아니스트가 자유롭게 연주하지만 협주는 자유로운 표현을 넘어 여러 악기가 하나의 음악을 완성한다. 장애의 벽을 뛰어넘어 이들이 함께 만들어 낼 화음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유씨는 선천적으로 안구가 없었다. 시각장애인인 그의 연주에는 악보가 존재하지 않는다. 악보는 볼 수 없지만 그는 한 번 들었던 음악을 잊지 않고 그대로 피아노 연주로 옮길 수 있다. 오로지 소리에만 의지할 뿐이다.
유씨의 연주가 특별한 이유는 또 있다. 여섯 살이던 2008년 제5회 밀알콘서트 무대에 올랐던 그는 15년 만에 어엿한 피아니스트가 돼 협연 무대에 오르기 때문이다.
피아노 꿈나무가 피아니스트로
유씨가 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 가족들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했다. 부모의 사랑은 그가 살아가는 원동력이다.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시설에 맡겨진 유씨를 돌보던 원장 부부가 시간이 지나도 친부모가 데리러 오지 않자 직접 입양했다.
유씨는 중증 장애인인 아버지 유장주씨와 경기도 포천에서 작은 장애인 시설을 운영하는 어머니 박정순씨 슬하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작은 아이를 입양한 부부는 ‘예수님 은혜’라는 의미를 담아 ‘예은’이라는 이름을 선물했다. 아이가 없던 부부는 육아 경험은 없었지만 낮에는 성경과 동화를 읽어주고 저녁에는 찬송을 불러줬다. 잠잘 때는 늘 클래식 음악을 들려줬다.
유씨의 재능은 세 살 때 나타났다. 동요를 듣던 아이가 바로 피아노로 가더니 음을 그대로 친 것이었다. 유씨의 재능을 알아차린 어머니는 그때부터 피아노를 가르쳤다. 절대음감을 타고난 유씨의 실력은 빠르게 늘기 시작했다.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그는 2021년 한세대 음악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대학에서는 화성학, 작곡 등과 같이 이론 공부도 병행해야 했기 때문에 수업 따라가기가 어려웠다”며 “다행히 지금은 활동 보조사 선생님과 기술의 도움을 받아 잘 적응하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로 유씨는 매주 한 악장을 외우고 매일 4~5시간씩 연습하고 있다.
‘특별한 이야기’가 깃든 연주
어떤 음악을 하고 싶냐는 질문에 유씨는 성경 이야기를 바탕으로 음악 동화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연주뿐 아니라 작곡도 하는 현재의 음악 세계를 넓혀가고자 하는 바람에서다.
성경 속 인물 중 다윗과 모세를 좋아한다는 그는 “다윗과 골리앗 대결과 모세의 40년 광야 생활 이야기를 음악으로 표현하고 싶다”면서 “시각장애인들에게 이처럼 다양한 동화를 피아노로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
그에게 있어 피아노는 단순 연주가 아니라 ‘피아니스트 유예은’이라는 동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장애인이라는 편견은 그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인터뷰 내내 미소를 잃지 않던 그는 ‘장애인 차별’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웃음기를 지우고 가슴에 담아 뒀던 속마음을 털어놨다.
그는 “장애인도 각자의 능력이 있다는 걸 인정해주고 바라봐줬으면 좋겠다. 사람들에게 장애에 관해 얘기하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며 “마치 동정해달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데 단지 내 상황이 이렇다는 것일 뿐 다른 의미는 없다”고 강조했다.
장애인은 동정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비장애인이 과하게 눈치를 보거나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등 감정적인 소외감을 느꼈던 경험도 언급했다. 다가오는 콘서트가 설레는 이유도 비슷한 맥락에서다. 장애와 비장애인 구분 없이 시·공간을 넘어 개인이 가진 재능만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분이 콘서트에 오셔서 제 연주를 듣고 위로와 희망을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같은 처지에 있는 장애인들도 도전을 멈추지 않고 꿈을 이뤘으면 좋겠고요. 저 또한 계속해서 저만의 음악 세계를 만들어 가고 싶어요.”
군포=글·사진 유경진 기자 yk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