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히 울보 됐죠, 뭐. 여기저기 ‘짤’(이미지)이 도는 바람에 친구고 선배고 다 전화해선 놀리더라고요.”
프로농구 서울 SK 전희철 감독은 2년 전 사령탑을 맡은 이래 두 시즌 연속으로 카메라 앞에서 눈시울을 붉혔다. 2021-2022시즌 통합 우승을 거둔 뒤 그는 코트 위에서 아내와 두 딸을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1년이 지나 2022-2023시즌 챔피언결정전에서 고배를 마신 직후에도 전 감독은 울었다. 인터뷰실과 뒤풀이 장소에서 오열하는 모습은 구단 유튜브를 타고 화제가 됐다.
지난달 23일 서울 종로구의 한 음식점에서 전 감독을 만났다. 무용을 배우는 둘째 딸의 공연을 참관하랴, 결혼 20주년 부부 동반 여행을 준비하랴 바쁘다면서도 얼굴빛은 시즌 중보다 한결 가벼웠다. 너무 자주 우는 게 아니냐는 물음에 “부쩍 눈물이 많아졌다”며 멋쩍어한 그는 “선수와 팬, 구단 직원들 모두에게 미안했다”고 털어놨다. 2주도 넘게 지났지만 여전한 아쉬움이 묻어났다.
“우승은 하늘이 정해준다”
그럴 만한 시즌이었다. 주축 포워드 안영준과 최준용이 각각 입대와 부상을 이유로 나란히 전력에서 이탈한 SK는 최악의 시나리오로 1라운드를 보냈다. 2승 6패를 거뒀고 순위는 9위까지 추락했다. 한 시즌 좋은 성적을 거두고 다음 시즌 곧바로 추락하는 ‘퐁당퐁당’ DNA가 발현하는 게 아니냐는 시선까지 나왔다. 사령탑의 고민도 깊어갔다. 당시 선수들과 본인 모두 시행착오를 여럿 겪었다고 설명한 전 감독은 “밤에 잠을 못 이뤘다. 약을 먹어야 겨우 눈을 붙였다”고 돌이켰다.
2라운드부터 기류가 달라졌다. 라운드 7승 3패를 기록하면서 단숨에 중위권으로 도약했다. 지난 3월 일본에서 열린 동아시아슈퍼리그(EASL)는 여기에 날개를 달았다. 부상 재발로 못 뛴 최준용의 공백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최부경 등 남은 선수들의 경기력이 살아났다. 그 결과가 정규리그 6라운드 전승과 플레이오프(PO) 준우승이었다.
와이어 투 와이어(처음부터 끝까지 1위) 우승팀 안양 KGC인삼공사를 상대한 챔피언결정전은 백미였다. 7차전 연장까지 가는 끝장 혈투에 관중몰이까지 성공했다. 프로농구 사상 최강의 패자라는 찬사까지 나왔다. “화가 날 것 같아 7차전 리플레이를 돌려 보지 못했다”던 전 감독도 팬들의 성원엔 연신 감사를 표했다. 그는 “(챔프전) 표를 못 구해서 난리였다더라”며 “결국 인기가 있어야 농구도 발전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강 ‘노인즈’의 탄생
시즌을 마쳤지만 마음 놓고 쉴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곧바로 자유계약선수(FA) 시장이 열렸다. 유독 대어급 선수들의 이적이 잦았던 올해지만 SK는 특히 그 중심에 있었다. 최준용을 전주 KCC로 떠나보냈고 알짜 가드 최성원은 라이벌 KGC로 유니폼을 갈아입었다. 대신 KGC의 프랜차이즈 스타인 오세근을 데려오면서 메가톤급 영입에 성공했다.
당초 SK는 팀 구성 등을 고려해 KBL 최고 수비수 문성곤에게 눈독을 들였다. 팀 구성은 물론 오세근이 KGC에서 차지하는 상징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이적 가능성 자체가 크진 않다고 봤다. 그런데 문성곤이 수원 KT로 향하고 오세근이 시장에 나오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전 감독은 “(KGC에서) 정말 매력적인 선수지 않았느냐”며 “솔직히 우리는 (오세근에게) 접근도 못 할 줄 알았다”고 회고했다.
오세근의 합류로 전 감독의 새 시즌 구상은 달라졌다. 과거보다 한층 묵직한 농구를 할 수 있게 됐다. 종전의 SK가 특유의 속도와 화려함을 앞세워 속공 중심의 경기를 했다면, 앞으론 빠른 템포를 유지하되 오세근의 미들 슛과 파워, 농구 지능(BQ)까지 십분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이미 최근 두 시즌 연속으로 리그 최다 득점을 기록한 SK지만 전 감독은 더 높은 곳을 바라봤다. 그는 “세근이는 확실한 선수”라며 “‘농구를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딱 들더라. 지금보다 (팀) 득점이 더 늘어날 수도 있다”고 자신했다.
불안 요소가 없는 건 아니다. 주전들의 적잖은 나이가 대표적이다. 허일영은 38세고 오세근 김선형 최부경 모두 30대 중반이다. 최준용이 KCC 입단 회견에서 전 소속팀을 ‘노인즈’라고 도발한 데도 이유가 있는 셈이다. 그러나 전 감독은 “노인들에게 제대로 당할 것”이라고 받아넘겼다. 오세근과 최부경에겐 20분 안팎의 출전 시간을 나눠 맡기며 체력을 안배하고, 2·3번 포지션에선 아시아 쿼터 영입 등을 통해 안정적 로테이션을 도모한다는 구상이다.
스타, 형님, 그리고 명장
스타 플레이어가 지도자로 성공하기 힘들다는 건 종목을 가리지 않는 통설이다. 농구대잔치 세대로 대학(고려대)과 프로에서 ‘에어본’으로 불리며 최고 인기를 구가했던 초보 감독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의구심이 섞여 있었다.
전 감독은 두 시즌 만에 의심을 확신으로 바꿨다. 특유의 형님 리더십을 전면에 내세웠다. 평소엔 격 없이 선수들과 어울려 농담을 주고받다가도 실망스러운 경기력엔 불같이 일갈했다. 개성 강한 SK 선수단을 한데 어우르며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대표적 사례가 외국인 선수였다. 대다수 팀이 외국인 선수의 부상이나 부진, 팀워크 문제로 한 번씩은 골머리를 썩었지만 SK는 달랐다. 특히 자밀 워니는 2020-2021시즌 부진을 털고 리그 최고 외인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코치 시절 슛 폼을 교정해준 게 인연의 시작이었다.
둘의 관계는 단순 지도자와 외국인 선수를 넘어선 상호 신뢰로 발전했다. 전 감독이 아플 때면 먼저 다가와 안부를 걱정하고 어깨를 주물러 줄 정도다. 그는 “아들을 키우는 느낌이다. (성을 따) ‘전워니’라고 하는데 본인도 좋아하더라”고 웃음 지었다. 묵묵히 자기 역할을 다하는 리온 윌리엄스도 고맙긴 마찬가지다. 인터뷰 이후 SK는 둘과 나란히 재계약하며 다음 시즌 전력 구성의 핵심 퍼즐을 맞췄다.
선수단 미팅과 인터뷰를 가리지 않고 데이터를 강조하는 것도 전 감독의 특징적인 면모 중 하나다. 그는 열 마디 말보다 한 가지 명확한 수치가 더 설득력 있다는 지론의 소유자다. SK 운영팀장으로 재직하면서 기록지를 끈질기게 들여다본 경험이 여기에 영향을 미쳤다. 프론트에서 보낸 나날들은 ‘대스타’의 자아를 내려놓는 데에도 도움을 줬다. 그는 ‘사회 공부’를 했다고 표현했다.
3년짜리 계약을 맺었고 부임 첫해 통합 우승, 2년 차에 준우승을 차지했다. 그런 전 감독에게 팬들은 압도적 지지를 보냈다. 일각에선 ‘명장’이란 찬사까지 흘러나왔다. 본인은 정작 손사래를 쳤다. 증명할 것이 많이 남았다는 취지다. 그는 “첫해엔 ‘선수빨’이라고 했다”며 “올해는 ‘운빨’로 볼 수도 있다”고 말했다. 표현은 겸손했지만 어조에선 뼈가 느껴졌다. 내년 봄 다시 한번 승자의 눈물을 흘리겠다는 선언으로 들렸다.
송경모 기자 sso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