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이른 무더위가 맹위를 떨친 지난달 16일 오전 인천 미추홀구 제물포밥집 앞. 배낭과 바퀴 달린 장바구니를 든 어르신 수십명이 일렬로 길게 줄지어 서 있었다. 오전 10시. 밥집이 문을 열자 이들이 가방에서 꺼내든 건 다회용 밀폐용기와 보온병이었다. 제물포밥집이 준비한 밥과 국을 담아가기 위해 미리 챙겨온 것들이다. 장애인 복지단체인 함께걷는길벗회(길벗회) 설립자 한용걸(61) 대한성공회 신부의 기도로 배식이 시작되자 봉사자들은 밝은 표정으로 어르신을 맞았다.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밀폐용기에 밥을 담으며 봉사자가 안부를 묻자 어르신도 스스럼없이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이날 메뉴는 흰밥과 김치콩나물국, 요구르트와 생버섯 한 봉지. 봉사자들은 어르신이 꺼낸 용기에 밥과 국을 담은 뒤 가방에 버섯과 요구르트를 넣었다. 지팡이에 의지해 온 어르신의 경우엔 의자를 따로 마련해 줄을 서지 않아도 배식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동인천역 인근에서 병석에 누운 남편과 산다는 A씨(81)는 “두 달 전부터 밥집을 찾는 데 올 때마다 항상 친절하다”며 “밥은 물론이고 국도 정성스럽다. 남편과 같이 먹을 것”이라고 했다. 봉사자에게 ‘흰밥 할매’로 불리는 B씨(85)도 “허리가 아파 한 달 만에 왔다. 국은 무겁기도 하고 먹어도 소화가 안 돼 흰밥만 가져간다”며 “봉사 덕분에 그저 감사할 뿐”이라고 입을 모아 칭찬했다.
한 신부는 이들에게 ‘대표님’이나 ‘목사님’으로 불렸다. “여기 오는 분은 제가 누군지 거의 모릅니다. 말을 일절 안 하니까요. 심지어 ‘사장님’으로 부르는 분도 있어요. 제가 누구인지가 뭐 중요하겠어요. 우리가 밥을 나누는 이들이 위로받는 게 중요하지요.”
형제가 굶고 있다
제물포밥집은 금·토·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 일주일에 3일만 운영한다. 한 신부가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0년 9월 문을 열었다. 팬데믹으로 노숙인 무료급식소 운영이 중단됐다는 뉴스를 접한 게 계기다. 그는 1999년 외환위기 당시 인천 수봉공원에서 무료 국숫집을 운영한 경험이 있다. “뉴스를 보며 ‘형제가 굶는구나. 이번에도 누군가는 밥을 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이면 위험하다니 각자 흩어져 먹도록 주먹밥을 주면 된다는 계획도 세웠고요.”
봉사자를 모아 주먹밥 300개를 만든 그는 인천 주안역과 제물포역, 동인천역 등을 찾아 노숙인에게 식사를 전했다. 3개월간 이들 역을 돌다 보니 주먹밥을 찾는 이들 가운데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독거노인이 적잖다는 걸 알았다. “어르신께 끼니를 제공하려면 주먹밥을 주기보다 아예 밥집을 차리는 게 낫겠더라고요.”
한 신부는 길벗회 복지시설이 있던 현 밥집 공간을 식당으로 개조한 뒤 독거노인 무료배식소를 열었다. 제물포역 인근에 있는 배식소 이름은 ‘제물포밥집’으로 지었다. 이름이 직관적이어야 어르신이 찾아오기도 쉽다는 판단에서다.
‘하루하루가 기적’인 밥집
팬데믹 시국 속 무료급식소 운영은 그야말로 목숨을 건 일이었다. 봉사자들은 ‘이곳에서 코로나에 감염돼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구두 다짐을 하고서야 밥을 지을 수 있었다. 주택가 골목에 자리 잡은 밥집 위치도 문제였다. 코로나가 창궐하던 당시 무료급식소가 생기는 걸 달가워하는 주민은 아무도 없었다. 일부는 ‘허락도 없이 위험한 일을 한다’며 욕설을 퍼부었다.
한 신부가 “지역 상인과 주민의 염려는 당연하다”며 낮은 자세로 밥집 운영을 지속하자 지역 민심도 호의적으로 변했다. 한 상인은 6개월 전부터 지금껏 봉사자의 중식 반찬을 제공하고 있다. 또 다른 상인은 밥집에 난방용 기름을 제공한다. 밥집 시설을 현대식으로 바꿔주겠다는 제안도 받았다.
“밥집을 운영하는 하루하루가 기적의 연속입니다. 매일 10명의 봉사자가 필요한데 밥집을 운영하는 3년 내내 일손이 모자란 적이 없습니다. 쌀이나 식재료, 간식도 마찬가지고요. 외부에 요청을 일절 하지 않아도 그래요.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십니다.”
삶으로 신앙을 보여라
한 신부는 30년간 인천 지역 노숙인과 장애인을 돌봐온 ‘빈민의 길벗’이다. 한신대 철학과를 거쳐 성공회 신학연구원에 진학한 그는 졸업 후 인천 지역 빈민과 한집에서 살며 본격 빈민 선교를 시작했다. 이후 주간단기보호센터와 장애인보호작업장 등을 운영하며 장애인의 교육과 재활, 사회 적응에도 힘썼다.
“빈민과 함께 산 건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 아니었어요. 같이 살러 간 거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밥을 주며 믿음을 요구하지 않아요. 하나님은 쩨쩨한 분이 아니거든요. 교회가 하나님 향기를 자연스레 드러내면 말하지 않아도 복음은 전해집니다. 니케아신경을 외우는 것보다 중요한 건 신앙을 삶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팬데믹 여파로 끼니를 놓치는 독거노인이 사라지면 제물포밥집은 문을 닫는다. 외환위기 당시 운영한 국숫집이 7년 후에 문을 닫았듯 밥집도 제 역할을 다 하면 해산하는 게 당연한 수순이라는 것이다. 그에게 향후 계획을 물었다. “그리스도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와 함께 계십니다. 앞으로도 그분이 계신, 가난한 사람의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계속 가겠습니다.”
인천=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