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찾는 외국인 환자들이 늘면서 나에게 의뢰되는 외국 소아 환자들도 조금씩 늘고 있다. 내 전공이 소아암이다 보니 하나같이 절박한 환자들이다. 고국에서 치료받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중저소득 국가의 소아암 진료 수준은 표준 치료와는 꽤 거리가 있다.
코로나로 국경이 단단히 잠겨 있던 2년 전에 나를 찾아온 몽골 소아 환자가 있었다. 몽골인들의 외모는 한국인과 정말 비슷하다. 내 앞에 나타난 4살 꼬마 여자아이의 얼굴도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여느 한국 아이와 다를 게 없었다. 다른 점이라면 배가 심하게 부풀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10㎝가 넘는 커다란 콩팥 종양 때문에 의뢰된 것이다. 모든 소아암 환자가 절박하지만 삼엄한 코로나 방역망을 뚫고 낯선 나라로 날아온 꼬마라면 그 절박함은 더욱 커진다.
소아의 콩팥 종양은 거대한 크기 때문에 험해 보이지만 일반적으로 90% 이상의 완치율을 기대할 수 있다. 계획대로 항암치료를 하고 수술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나니 부풀었던 아이의 배는 부드러워지고 아이와 아빠는 웃음을 되찾았다. 치료가 끝나갈 무렵 아이 아빠가 나에게 작은 선물을 줬다. “이 선물을 받아 주시면, 우리 아이가 무사히 치료를 끝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파란 캐시미어 목도리였다.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지만 몽골 하늘이 이렇게 파랄까.
90% 완치율의 함정은 10%의 실패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 10%의 무게가 90%의 높은 기대만큼이나 무겁다는 점이다. 아이 종양은 예상치 않게 다발성으로 재발했다. 당혹스러웠다. 그동안 비슷한 조건의 환자가 재발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이것 역시 함정이었다. 이제 10%의 차례가 된 것이다.
소아혈액종양 의사의 가장 큰 보람은 완치된 아이들의 웃음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아이들을 잃기도 한다. 90%의 환자를 완치시키는 기쁨의 농도보다 10%의 환자를 잃는 슬픔의 농도가 훨씬 진하다. 간혹 경험하게 되는 상실의 슬픔이 감정의 반투막을 통과하면서 아이들을 살리는 기쁨의 감정과 삼투압의 균형을 이룬다. 결국 슬픔 때문에 기쁨이 희석되는 삶이 소아혈액종양 의사의 숙명인 것이다.
재발한 종양을 치료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다양한 치료 방법을 동원했지만 병의 진행을 막을 수 없었다. 종양을 치료하는 데 실패했더라도 의사로서 실패해서는 안 된다. 의사는 마지막까지 환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아이가 종양 때문에 고통스럽지 않도록, 그리고 환자 부모가 이 상황을 이해하고 아이와 헤어질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의사로서의 의무였다.
외래 대기 명단에 아이 이름이 떠 있을 때마다 종양을 치료할 수 없다는 무력감 때문에 너무 괴로웠다. 아이 얼굴은 여전히 해맑지만 부모 얼굴에는 절망과 불안의 그림자가 어둡게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의사는 환자와 부모를 끝까지 돕기 위해 절망에 정면으로 맞설 용기를 가져야만 한다. 나는 최선을 다해 아이에게 필요한 치료 옵션을 제시해 줬다. 그리고 내가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일은 아이가 이국이 아니라 고향의 하늘나라로 떠날 수 있게 해 주는 일이었다. 결국 부모를 힘들게 설득해 고국으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 아이 아빠로부터 메시지가 전달됐다. ‘우리 아이는 어젯밤에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시도해 볼 수 있는 모든 치료를 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아이는 캐시미어 목도리처럼 푸른 몽골의 하늘로 올라갔을까. 몽골에서 의료 봉사를 했던 한 선배는 늘 고비사막의 별들을 그리워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남은 일은 아이가 푸른 몽골 하늘의 별이 되길 기도하는 것이다.
고경남 서울아산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