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을 잘 잃어버리는 사람이 있다. 잃어버리고도 한참 지난 뒤에야 분실을 깨닫는다. 신발을 험하게 신는 사람도 있다. 새 신발을 신으면 진창을 밟는 일이 생기고, 보도블록 틈에 구두 굽이 끼여서 가죽이 벗겨진다. 무언가를 잘 떨어뜨리는 사람도 있다. 휴대폰 액정을 깨 먹고, 와인 잔이 손에서 미끄러져서는 ‘와장창!’. 이런 사람들은 하나만 하지 않는다. 잃어버리고 망가뜨리고 부수는 것, 전부 다 한다.
이것은 일종의 자기고백이다. 숱하게 잃어버리고, 허다하게 망가뜨리고, 무수하게 떨어뜨리며 살아왔다. 이런 이야기를 듣노라면 안타까운 심정이 들면서, 한편으로는 ‘대체 왜 그러고 사나’ 싶을 수 있다. 그리고 무언가를 망칠 때마다 화나고 짜증 날 것이라 짐작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런 자들은 정신승리의 달인이다. 자책에 매몰되지 않아야 일상을 이어갈 수 있으므로 나름의 방책을 찾는다. 이런 식이다. “중요한 것은 물건이 아니라 마음이지요. 떠난 물건은 어차피 돌아오지 않아요. 돌아오면 행운이고요. 그러니 물건 때문에 스스로를 찌르지 말아요. 물건에 절절매지 않기로 합시다. 잃어버리지 않을 자신이 없다면, 망가뜨리지 않을 확신이 없다면, 물건에 너무 마음을 주지 않아야 해요.”
무소유의 철학이라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저 ‘물건을 모시고 살지 않으면 마음이 편하다’는 간단한 얘기를 하는 거다. 어차피 잃어버리고 닳을 물건, 모시고 살지는 않겠다는 다짐이다. 잃어버리고 속상해하며 자책하던 날들과의 완전한 결별을 선언하는 것이다.
나는 이러고 살지만, 남들도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와 다른 삶을 구축한 사람들을 취재할 때의 자극은 대체로 긍정적이고 즐겁다. 그래서 이른바 ‘명품 오픈런’에 대해서도 늘 열린 마음으로 취재해 왔다. 취재 현장에서 느끼는 것도 다르지 않다. 새벽이슬을 맞으며 오픈런에 동참하는 이들의 현장은, 멀리서 보면 비극일 것 같지만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다. 그 시간을 즐겁게 기다리는 이들이 꽤 많다.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은 누구도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들 중 상당수는 ‘즐겁게’ 기다린다.
그런데 이른바 명품으로 불리는 럭셔리 브랜드의 마케팅 이면을 들여다보면 소비자의 즐거움이 불편해진다. 즐거움의 반대편에는 종종 오만함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온도는 언제나 싸늘하다. 배려도 존중도 없는 냉랭한 ‘돈의 기운’을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의 마케팅에서 감지하곤 한다. 잦은 가격 인상, 불친절, 사회 공헌에 참여하지 않는 것 등등이 그렇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그들의 서비스 정책을 볼 때면, ‘양보 없는 서비스’라는 게 얼마나 비논리적인 것인지를 곱씹게 된다. 서비스는 양보를 주고받는 일인데 말이다. 그런데도 이의 제기가 많지 않다. 이 대목이 굴욕적이다.
구찌의 경복궁 근정전 패션쇼와 루이비통의 서울 잠수교 패션쇼는 불쾌한 뒷이야기를 남겼다. 구찌는 국보인 근정전에서 맥락 없는 패션쇼를 펼쳤다. 그래놓고는 요란한 뒤풀이로 시민들의 불편을 끼쳤다. 루이비통은 잠수교 패션쇼를 위해 24시간 그 일대를 통제했다. 많은 이들이 황당해했다.
시민의 발을 묶어도 된다는 자신감, 눈과 귀를 괴롭혀도 무방하다는 당당함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기나긴 오픈런 줄, 상품을 받아든 감개무량한 손, 서비스 불만을 말해도 되는지 고민하는 모습, 돈을 내면서도 굽실대는 몸짓이 그들을 오만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그들은 우리를 그저 돈 잘 쓰는 쉬운 손님으로 볼 뿐이다.’ 이게 명품 브랜드를 취재해 온 날들의 소회다.
문수정 산업2부 차장 thursda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