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경제력이 가르는 출산력 격차, 더 벌어진다

입력 2023-05-25 04:05

지난해 결혼한 정모(38)씨는 요새 부모님을 만나기 두렵다. 내년 가을에는 손자를 보고 싶다는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분양 전환이 가능한 경기도 고양시의 공공임대 아파트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내년 하반기에는 이 아파트를 분양받기 위해 돈을 모으고 있다. 지금은 맞벌이로 한 달에 약 500만원을 벌지만, 아이가 생기면 아내가 한동안 일을 그만둬야 한다. 내 집 장만을 위한 빚 부담은 느는데 수입은 반토막 나는 셈이다. 정씨는 “아이를 가졌다가는 지옥이 펼쳐질 게 뻔하다”고 말했다.

서울 관악구에서 4명의 자녀를 키우는 주부 심모(36)씨는 양육비로만 매달 200만~300만원을 쓰고 있다. 올해는 셋째까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학원비 등 사교육비 부담이 급증해 걱정이 태산이다. 그는 “정부가 지원해준다고는 하는데 쥐꼬리 수준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남편이 월 600만~700만원을 벌고 있지만 심씨는 최근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는 “남편 수입이 적지 않은 수준인데도 외벌이로는 버티기 어렵다”고 말했다.

가난할수록 자녀를 많이 갖는다는 통념과 달리 최근에는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부부가 더 많은 자녀를 낳는 추세인 것으로 나타났다. 양육비 부담이 크게 늘면서 경제력이 출산력으로 직결되는 현상이 심화한 것으로 해석된다. 특히 다자녀 가구의 경우 양육비는 소득의 약 40%를 차지할 정도로 과중한 것으로 조사됐다. 정부의 보육 지원책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경제력에 따른 출산력 격차는 더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


24일 국민일보가 통계청의 ‘2022년 가계금융복지조사’의 마이크로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가구주가 만 50세 미만이면서 사별·이혼하지 않은 배우자가 있는 전국의 510만7050가구 중 소득 하위 10%에 속한 가구의 평균 가구원 수는 3.06명에 그친 것으로 집계됐다. 반면 소득 상위 10%에 속한 가구는 3.78명이었다. 경제력 차이로 인해 0.72명이라는 격차가 나타난 것이다.

가구원 수를 기준으로 봐도 양상은 같았다. 같은 조건에서 2인 가구의 연소득 평균은 7900만1000원이었다. 반면 5인 이상 가구의 연소득 평균은 9558만4000원으로 약 21.0% 높았다. 식구가 많을수록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다는 의미다.

자녀가 많을수록 소득 수준이 높다는 통계는 이뿐만이 아니다. 육아정책연구소가 지난해 발표한 ‘양육비용 및 육아서비스 수요 연구’에 따르면 지난해 자녀 1명이 있는 가구의 월평균 소득은 456만9000원이었다. 반면 자녀가 3명 이상인 다자녀 가구의 월평균 소득은 527만4000원에 달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다자녀 가구의 소득 대비 양육비용 비중은 40.0%였다. 다자녀 가구는 매달 자녀 양육에만 200만원 이상을 지출한 셈이다.

자녀가 1명일 때와 2명일 때의 양육비용 비중도 각각 소득의 17.6%, 29.5% 수준으로 조사됐다. 이정원 육아정책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한국은 영유아기 때부터 교육비와 보육비의 부담이 특히 크다”며 “자녀를 여럿 낳아 기르기 위해서는 소득 수준이 높아야만 하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다자녀 가구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여전히 부족하다는 점이다. 지난해 다자녀 가구의 전체 소득에서 정부지원금 등의 공적 소득이 차지한 비중은 13.0%에 그쳤다. 2자녀 가구의 경우에는 이보다 낮은 10.5%에 불과했다. 다자녀 가구의 소득 대비 양육비 비중은 코로나19로 인해 지원금이 급증했던 2020년을 빼면 2018년부터 매년 40%를 웃돌고 있다. 이 연구위원은 “부모들이 지원을 체감할 수 있도록 다자녀는 물론 2자녀 이상 가구까지 양육비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종=이의재 기자 sentin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