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기업 주주총회에서 낙태나 총기 규제, 기후변화 등에 대한 주주제안이 급증하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23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이사진 교체 등 주총에서 주로 다뤄지는 안건이 아닌 정치·사회 현안과 관련한 안건이 상정되는 경우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
WSJ가 인용한 한 의결권 자문기관 데이터에 따르면 이달까지 열리는 미국 기업들의 정기 주주총회에서 사회 현안과 관련한 주주제안이 74건 제출됐다. 지난해 같은 기간 43건보다 약 75% 늘어난 수치로 역대 최고 수준이다.
신용카드 업체인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아멕스)에서는 낙태가 불법화된 주(州)에서 낙태 용의자를 수사하는 법집행기관에 대한 회사의 협력을 제한하는 내용의 주주제안이 제출됐다. 아멕스 이사회는 수사기관에 협력하는 것은 법률상 의무라면서 주주제안에 반대입장을 밝혔고, 결국 투표에서 부결됐다.
구글의 모회사 알파벳은 비슷한 내용의 낙태 관련 주주제안을 부결시킬 것을 권고했지만 다음 달로 주총에서 이 안건에 대해 투표할 예정이다. 마스터카드는 총기 범죄 관련 판매 내역을 별도 카테고리로 분류하기로 한 것과 관련해 ‘거래 추적 가능성’을 우려하는 주주들의 압력에 직면해 있다.
‘지속가능성’ 분야 비영리단체 SII의 하이디 웰시 전무이사는 “정치권의 갈등이 주총으로 확산하고 있다”며 “기업들이 강제적으로 당파적 문제에 끌려가고 있지만 더 피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를 비롯한 공화당 정치인들이 ESG(환경·사회·지배구조)에 대해 반발하고 있는 가운데 보수 성향 주주들은 기업의 다양성 정책과 탈탄소화 실현 가능성 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들은 기업이 ‘수익’에 집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WSJ는 “정치적 스펙트럼의 양쪽에서 제안을 받는 기업들이 ESG 문제를 둘러싼 격렬한 논쟁에 휘말리고 있다”며 “이 같은 주주제안이 주총을 통과할 가능성은 작지만 회사 측에서는 어떤 사안이 부결되더라도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면 이를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게 된다”고 말했다.
의결권 자문 전문 로펌 로프스 앤드 그레이의 파트너 마이클 리튼버그는 “대부분 기업은 정치적 담론에서 벗어나고 싶어할 것”이라며 “주주제안 증가로 이사회는 제안 검토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피로도가 증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내년 11월 대선 등 미국의 정치 상황을 고려했을 때 사회 현안 관련 주주제안은 내년에도 증가할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
장은현 기자 e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