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친의 영향 때문인지 나는 아들 화철에게 잔정을 보이지 않았다. 초·중·고·대학교 입학식이나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았고 같은 캠퍼스에 다녔으면서도 4년간 한 번도 내 차에 함께 탄 적이 없다. 군에 입대할 때도 나의 경우처럼 대문 앞까지만 나왔고 면회는 물론 가지 않았다. 어렸을 때 중증 장애인들이 우리 집에 민박한 적이 있는데 그 영향인지 자신은 특혜를 너무 받았다고 느끼고 어떤 편의도 요구하지 않아 키우기가 편했다. 그리고 중학교에 입학하자 장애인 친구를 사귀었고 그들의 우정이 수십 년 동안 이어져 보기에 좋았다.
아들은 철학과를 졸업하고 특별한 계획이나 준비도 없이 벨기에의 역사 깊은 르벤대학에 입학했다. 그 나라에는 등록금이 없고 생활비는 그 나라에 파견된 한국 상사 직원들의 자녀 과외수업과 그 나라 방문 한국 기업인들 통역으로 충당했기에 따로 송금하지 않아도 되었다. IMF 외환위기 때는 한국 상사직원들이 대거 귀국해 마른 빵을 얻어먹는 등 고생을 좀 한 모양인데 전혀 알려주지 않아 돕지 못했다. 가능한 한 부모의 신세를 안 지려 한 것이다.
공짜로 공부하고 기술철학에 박사학위를 받아 귀국했는데 일자리가 없어 시간강사로 돌아다녔다. 그때 계속 실직자로 남지 않을까 걱정을 좀 했다. 그러다가 한 지방사립대의 철학 교수 공모에 응모했는데 유혹이 생겼다. 당시 총장 고 김영길 박사가 억울하게 구치소에 갇혔을때 구명 운동에 참여할 정도로 서로 잘 아는 사이였으므로 아들을 위해서 전화 한 통 해보고 싶은 유혹이었다. 아들과 의논했더니 펄쩍 뛰면서 “절대로 하시면 안 됩니다”라고 했다. 그런데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며칠 동안 전화기를 들었다 놓았다 했다. 그러다가 ‘총장을 아는 아비가 없는 다른 지원자’의 처지를 생각하니 전화할 용기가 없어졌다.
아들은 예비 심사에 합격해서 마지막으로 총장의 면접시험을 받았다. 지원 서류를 뒤적이던 김 총장이 어느 구석에 내 이름이 적힌 것을 보고는 “당신이 손봉호 교수 아들이요?”하고 물었다 한다. 아들이 그렇다고 했더니 “당신 아버지는 어떻게 나한테 전화 한 번 안 걸어?” 했다고 한다. 김 총장은 다른 모임에서도 그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어쨌든 아들은 합격해서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혹시 내 아들이기 때문에 김 총장이 합격시킨 것이 아닌지 걱정되었다. 그래서 아들이 학교 덕을 보는지 아니면 학교에 이익을 끼치는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감사하게도 학교와 학생들을 극진히 사랑하고 학생들의 사랑과 동료 교수들의 인정도 받는 것 같아 안심하고 있다.
나의 신세를 안 지려는 그의 자존심과 약자에 대한 그의 관심 때문에 나는 안심하고 그가 사는 집값의 5배나 되는 금액을 장애인을 위해 기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의 억제된 사랑에도 불구하고 다른 대학에 있는 며느리 수연과 함께 효도를 잘하고 있어서 하나님의 축복으로 알고 감사한다.
정리=유경진 기자 ykj@kmib.co.kr